한량모임

by 주저리

어느 여름, 친구 N이 내 자취방에 눌러앉은 지 며칠째 되던 날이었다. 거실에 누워 하릴없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뒤적거리던 중, 한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나의 첫 번째 마음 친구, 아트퍼스트>. 자세히 읽어보니 비용을 따로 받지 않고 글, 그림 등 예체능 계열의 수업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공대를 졸업하고 제조업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늘 책과 예술을 좋아했던 터라 단번에 관심이 갔다. 게다가 당시 N을 불러다 며칠간 지내게 할 정도로 지독한 우울과 고독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바로 신청서를 썼다. 일단 나를 집 밖으로 끌어내 줄 외부의 힘이 필요했고, 아트퍼스트는 이에 제격이었다.


수업 첫날, 마음 챙김을 함께 할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강의는 ‘좋은 에세이를 쓰는 법’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었다. 소통이라기보다는 교육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감성보다는 이성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옆 사람에게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고 싶었는데, 수업이 끝나니 다들 어디론가 바쁘게 사라져 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느릿느릿 강의장을 빠져나가는데, 다행히 엘리베이터 앞에 몇 명이 남아있었다. 눈치를 보다 슬쩍 인사를 건네며 MBTI를 물어보았더니 신기하게도 다들 ENF- 였다. 가벼운 공감대를 바탕으로 지하철역 입구까지 걸어가며 쏟아내듯 대화를 나누었고, 다음 수업 때는 식사를 하자고 약속까지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무언가 꽉 찬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친구를 사귄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이던가.


지금까지 나는 주로 학교나 회사에서 친구를 사귀어 왔다. 학교와 회사는, 성격과 관심사가 제각기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한 공간에 잔뜩 모아둔 다음 서로에게 적응하라고 요구한다. 심지어 그들과 매일 빠짐없이 만나야 하며 소통도 해야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몇몇과 더 많은 대화를 하게 되고, 더 깊은 경험과 생각을 교류하며 친한 사이로 발전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나의 친구들은 대체로 우연히 만나 형성된 관계가 많았다. 심지어 아주 잘 맞지는 않더라도, 짝꿍이거나 같은 팀이라는 이유로 절대적인 시간을 많이 보냈기에 친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에세이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은 기존의 친구들과는 조금 달랐다. 글을 사랑하며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구태여 서울 한구석에 모였다. 놀랍게도 우리는 대부분 산을 좋아했고, 작고 귀여운 것들을 사랑했으며, 같은 것을 보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들과 어울리면서 지금껏 내가 사람들과 나누었던 교류는 감정보다는 경험에 치중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감정에 대해 진솔하게 전달하는 일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충만했다. 내 감정을 누군가 진지하게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자기 일처럼 생각해 주는 그 과정은 이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친구'라는 관계는 예전과 달라졌다. 항상 곁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시간을 따로 내야만 만날 수 있는 선택적인 관계로 변했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 함께했던 친구와도 생각이나 가치관이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했다. 예전에는 '지금'을 함께하는 이들이 친구였다면, 이제는 나와 마음을 나누고,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친구로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트퍼스트 포스터 속의 문구처럼, ‘나의 첫 번째 마음 친구’가 되었다.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인간관계.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나는,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더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이 친구들과의 만남은 내 삶에 작은 변화를 주었고, 그 변화 속에서 나는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했다. 오늘도 그들과 함께하며 나는 또 다른 ‘충만’을 배우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