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을 걷고 있는 대학동문을 발견한 뒤 푸는 소회
어느 휴일, 미뤄왔던 엔진오일 교체를 위해 차를 카센터에 맡겼다. 한 시간가량 걸린다는 말에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근처의 작은 서점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결정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서점은 최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특히 독립서점은 제목부터 소재까지, 대형서점에선 쉽게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기에 인디밴드 음악만 찾아 듣는 나에게 딱 알맞은 곳이다.
선반 위의 책을 뒤적이던 중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작가 이름이 눈에 익어 자세히 살펴보니 대학 선배이다. 그 선배는 학교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종종 교내 행사에서 사회를 보시곤 했는데, 나 또한 학생회 비슷한 활동을 했던 터라 오며 가며 그를 마주칠 일이 있었다. 물론 그는 나를 모르겠지만. 책장을 휘휘 넘겨보자 우리 학교 이름도 나왔다. 반갑기도 하고, 동문의 책을 한 권 사주고 싶은 마음에 책을 구매했다. 집에 와서 머리말을 읽어보는데, 또 다른 선배의 이름이 나왔다. 이 선배는 출판사를 차렸다고 한다. 놀라운 마음에 검색해 보니 정말 출판사를 하고 계셨고, 최근 흥미롭게 읽었던 또 다른 책도 해당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기함을 넘어선 감정이 들었다. 우리의 출발선은 분명 같았을 것이다. 우리 학교는 1학년 때 자율전공으로 입학해서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게 한다. 그 시절의 나는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골랐고, 적당히 공부하여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 결과 서점에서 책 1권쯤은 가볍게 살 수 있게 되었고, 고급 슬리퍼를 3켤레쯤 갖고 있으며, 원치 않아도 주말에 근무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선배들은 아마도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것 같았고, 한 명은 개그맨이, 한 명은 출판사 사장이 되었다. 한 번도 내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문득 20대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꿈을 좇았을 그들이 부러워 질투가 났다.
심지어 그 질투를 하는 순간에도 나는 회사에 있었다. 일요일이었지만 당번 근무를 위해 억지로 출근했고, 일이 없어 네이버를 뒤적이며 출판사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상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최근에 이웃의 블로그에서 본 ‘다음 생에 꼭 저 일을 해야지’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다음 생 이라니, 웃기는 말이다. 다음 생이 대체 어디 있다고. 갑자기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의미 없게 다가왔다. 내가 가진 명함도, 집도, 돈도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꽤 오랫동안 꿈이 만화가였다. 이과를 선택하고 공대에 진학할 때, 나중에 취업해서 돈 벌어 생활이 안정화되면 투잡으로 만화를 공부해서 데뷔하겠다고 싶다는 상상도 했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회사에서 시달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빨래를 갤 힘도 없이 진이 쭉 빠져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회사생활 4년 만에야 적응이 끝나서 책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 여력이 생긴 것이다.
같은 곳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도착점에 서있는 선배들을 보며 부러웠지만, 한편으론 내가 걸어온 길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원하는 것을 이제라도 분간할 수 있게 된 이유는 그간 겪은 다양한 경험과 후회 덕분이다. 대기업에 취직해서 환희하고, 상상과 다른 환경에 우울해하고, 일을 지루해하다가도 인정받기 위해 온 힘을 쏟아보기도 하며 내가 바라는 것과 피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러자 이제야 원하는 것을 탐색하고, 탐닉하고, 포기할 수 있었고, 회사가 돈의 대가로 나에게서 앗아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만 같다. 직접 해본 경험이 아니면 잘 믿지 않는 나에게 어쩌면 꼭 필요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자주 방전되고 길을 잃지만 종종 나의 이야기와 생각을 써 내려가고 싶다. 누구나 작가가 되는 시대이지 않는가. 오늘이 나의 새로운 출발선이 되면 좋겠다. 나의 20대는 경험과 방황이었지만, 30대에는 적어도 꿈은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