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노랗다 못해 주황빛이 도는 잘 익은 늙은 호박 하나면 온 가족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호박죽이 한솥 만들어졌다.
우리 가족은 새알심 넣은 호박죽 보다 팥을 넣은 호박죽을 더 좋아했다.
호박죽을 끓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솥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천천히 나무주걱으로 저어 주라며 그 주걱을 내손에 맡기셨다. 그리고 엄마는 겉절이를 만드셨는데, 호박죽은 겉절이나 신김치, 그 어떤 것과도 잘 어울렸다.
호박죽을 타지 않게 천천히 젓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팔도 아팠고, 잠시만 방심해도 바닥이 타거나 눌기 십상이었다. 엄마가 그 막중한 임무를 나에게 맡기신 것은 첫째라서, 듬직해서 라기 보단, 세 딸 중 가장 튼튼한 팔을 가진 딸이 나여서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천천히 무념무상으로 한참을 저어 주고 나면 달콤한 팥알이 둥둥 떠 있는 맛있는 호박죽이 된다. 호박죽은 뜨거울 때도 맛있지만, 식어도 맛있다.
호박죽을 크게 한 수저 떠서 김장 김치 쭉 찢어 올려 먹는 맛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겨울철 별미였다. 아, 맞다. 시원한 동치미랑 먹어도 정말 맛있다.
우리 부모님은 이십여 년 전, 오십 대 후반에 다른 나라로 이주하셨다. 남은 생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나셨다. 지금도 그 꿈을 다 이루지 못해, 그곳에 사시며 일 이년 마다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오시긴 하지만, 오래 함께 할 순 없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오늘은 유난히 예전에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호박죽이 그리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