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 자매는 짓궂은 장난을하거나 자주 싸우기도 했지만서로를 많이 아끼는 자매들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외가 쪽으로 3대째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녔고,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교회에서의 재미있던 추억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학교 끝나면 교회로 뛰어가 아무도 없는 유년부실에서 풍금을 치며 혼자 몇 시간씩 노래를 불렀던 기억, 매년 여름이면 여름성경학교 개근을 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교회로 뛰어갔던 일, 여름성경학교가 끝나면 선생님들과 친구들 함께 동네 냇가에 가서 검은색 튜브를 타며 물놀이했던 일들, 크리스마스 때면 선생님들과 함께 무쇠 난로 옆에서 호빵을 먹으며 밤늦게 까지 남아 연극 배경 그림을 그리고, 천사 옷을 입고, 연습하던 일들.... 그때의 추억과 경험들이 아직도 생생 합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때, 한 살 어린 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으로, 학교에서 봄소풍을 다녀왔습니다. 봄 소풍을 다녀온 동생이 저녁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원인은 잘 몰랐지만 열도 나고, 아파 보였습니다.
소풍날, 날씨도 더웠는데 왕복 3시간을 걸었으니 힘들었을 거라며, 부모님은 단순한 감기 몸살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3일을 고열로 시달리고, 3일째 되는 날 밤엔 동생이 경기를 일으키는 모습을 본 부모님은 그제야 그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동생이 숨을 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부모님은 구급차를 불러 큰 병원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엔 막냇동생과 저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엔 휴대전화도 없을 때라 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느 병원으로 옮겼는지 몰라 저와 막내는 막막하고 두려웠습니다.
막연히 '동생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오후 저는 이웃 사람들로부터 동생이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생을 꼭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에 저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대학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동생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중환자실은 보호자 1명 외엔 들여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간호사들의 눈을 피해 몰래 들어갔지만, 동생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열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인지 속옷 외엔 모든 옷을 벗겨 놓았는데, 살구색이어야 할 몸이 진보라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의식도 없었고, 나중에 들으니 뇌수막염이었는데, 너무 늦게야 병원에 왔다는 말을 들을 뿐이었습니다. 엄마는 동생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어린 제가 보기에도 동생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중환자실에서 저를 발견한 간호사들이 밖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울면서 간호사 선생님들께 물었습니다. "혹시 이 병원에 기도실이 있나요? " 그러자 한 친절한 간호사 선생님께서 기도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저는 어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들었던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하나님께서 동생을 일으켜 주시면 동생이 나을 것만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선 이 땅에 계실 때 12살 야이로의 딸도 죽음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마가복음 5 장 42절),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고(눅7장 14),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도 살리셨기(요 11장 1-54)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야고보서 5장 15절)
저는 기도실로 달려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제 동생을 살려 주세요.
하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분 이 시잖아요.
아직 꽃 피워 보지도 못한 제 동생 살려 주세요.
제 착한 동생 살려 주세요." 하며 하나님께 울며 매어 달렸습니다.
제가 얼마나 몸부림을 치고 울었는지, 기도실에 있던 어른들이 다들 저를 불쌍하게 바라보셨다고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보시는지가 중요했습니다. 저를 불쌍히 봐주셔서 동생을 낫게 해 주시면 그것 만으로도 너무 감사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제가 다니던 교회에선 동생 소식을 들은 성도님들이 한분 두 분 교회로 모여드셨습니다. 정말 너무 고맙게도 예배당이 가득 찰 만큼 모인 성도님들이 제 동생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딸인 것처럼 하나님께 간절하게기도해 주셨습니다.
저도 이후 며칠간 동생이 아직도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동생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동생이 깨어났다는 소식 말이죠.
저는 너무 기뻐 또 버스를 타고 동생이 있는 병원까지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아직 동생을 볼 순 없었지만, 담당 간호사 선생님께 동생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 네 동생이 깨어났대. 정말 잘 됐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말로는 오랫동안 고열로 시달리며 뇌가 많이 손상되어 평생 지적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대 "
동생은 이후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었고, 저도 동생을 마음껏 보러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동생이 그동안 제가 알던 동생이 아니었습니다. 헛것이 보인다고 하거나, 손에 꽂힌 주삿바늘을 먹으려 하기도 하고, 이상한 말들을 하기도, 심지어 저를 못 알아보는 날도 있었습니다.
저는 동생이 깨어나지 못할 때 보다 더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동생이 이렇게 낯선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저와 우리 가족은 동생을 위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동생의 삶을 의탁했습니다.
동생이 다시금 예전처럼 총명하고 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지금 동생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동생은 이후 국립대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갑내기 목사님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며 두 명의 아이들을 키우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답니다.
평생 지적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의사 선생님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예전보다 더 총명해진 청소년기를 보냈고, 지금은 하나님께 인생 2막을 허락하심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나누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동생이 퇴원하던 날, 동생과 저는 주일 교회예배에서 짧은 간증과 함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찬양의 제목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양이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