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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주아 Jul 12. 2016

흐린 날의 아련한 루체른

밤이 내리면 로이스 강에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루체른에 도착하다

저녁 무렵 도착한 루체른은 날이 흐렸다.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중앙역은 평범했고 한켠에는 생뚱맞은 놀이기구들이, 머리 위로는 정체불명의 전선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스위스 패스가 있으니 대중교통도 무료지만 로이스 강변을 따라 천천히 숙소까지 걸어가 보기로 한다.


HOTEL REBSTOCK LUZERN. 4성급 호텔. 1박에 84유로. 조식 포함. 이번 호텔도 성공한 것 같다. 출근한 지 이틀 째라는 리셉션 데스크의 여직원은 앳된 미소를 지으며 정성스럽게 안내하려고 노력했다. 키를 건넨 뒤 슬금슬금 나를 따라오더니 엘리베이터까지 함께 탄다. 방까지 안내해주려는 것이었다. 사실은 내 방을 업그레이드해 주었노라고 자신이 더 기뻐하며 수줍은 듯 말을 하고는 문을 열방을 확인시켜준 다음 소소한 설명을 마치고 돌아갔다. 그녀의 '처음'이 풍기는 설렘이 나에게도 전해져 오는 듯하다. 게다가 따로 업그레이드 요청을 한 것도 아닌데 싱글룸 가격에 넓은 방을 쓰게 된 뜻밖의 기쁨이 잔뜩 흐린 하늘로 우울해지려던 마음을 조심스레 달래주었다.


비가 내리면 숙소로 돌아와 분위기 있는 이 창가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루체른 산책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나와 왼편으로 바로 보였던 호프 성당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묘지들은 생명력을 뽐내는 꽃과 잔디가 어우러져 묘한 감상에 젖게 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성당 내부로 들어섰던 그때, 마침 사진을 찍고 있던 이분을 마주쳤다. 그분의 사진 속에 내가 담겼을까 궁금해하며 나도 셔터를 누른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성당의 내부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인간은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완벽한 수준으로 건축된 이런 성당들을 볼 때마다 그 시대의 예술가들과 또 노동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극한의 아름다움을 요구할 수 있었던 건 또한 권력의 힘이었으리라 생각하면 마냥 감성적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수많은 장인들의 희생으로 인해 후손들은 이곳에서 거룩한 평안을 느낀다. 여행자인 나는 지친 다리를 쉬게 하고 싶을 때면 종종 가까운 성당에 들어가곤 했다. 고개를 들고 높은 천장으로부터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을 응시하는 순간은 언제나 신비롭고 따뜻하다.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면 고요함이 내 마음속 흙탕물까지 잠재워주는 듯했다.  


루체른 신시가지 거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서울시 강남구의 면적이 39.55㎢인데, 루체른의 면적은 고작 15.8㎢니 정말 작은 도시인 셈이다.


비가 그쳐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오후, 신시가지에서 쇼핑 삼매경에 빠졌다. 바지를 하나 사려고 갈등하다가 결심하고 가게로 다시 돌아갔더니 이미 문을 닫아버렸다. 루체른은 토요일엔 오후 4시면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는 것이었다. 더더구나 다음날인 일요일엔 맥도널드를 제외한 모든 가게가 휴무였다. 그런 까닭으로 금토일, 3일이나 머물면서도 결국 난 제대로 쇼핑을 하지 못했다. 내 입장에서 보면 답답한 노릇이지만 이곳 시민들의 라이프스타일 면에서는 부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악착같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보편적 안정감이 말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루체른 신시가지의 쇼핑거리


신시가지에 있는 MANOR 백화점




로이스 강을 따라

강변에서는 줄지어 서 있는 천막들 아래로 과일과 야채, 꽃과 먹거리 등을 파는 다양한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중앙역 앞 놀이기구들도 그렇고 강변 마켓도 그렇고 - 루체른의 특징이라고 해야 할지 스위스 스타일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 여러모로 서민적인 혹은 실용적인 풍경이 종종 펼쳐지는 듯했다. 예컨대 파리의 센 강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위기인 것이다.


아담한 로이스강을 사이에 두고 (사진에서) 왼편이 구시가지, 오른편이 신시가지이다. 강변에는 전망 좋은 고급 호텔과 카페가 가득 들어서 있다.  


탄성이 터져나오는 장관은 아니지만 소박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강위로 반영된 중세풍 호텔 건물들의 풍경


흐린 날의 산책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리기산과 엥겔베르크를 갈 생각으로 루체른에서 3일씩이나 머물기로 계획한 것이었는데, 구름이 잔뜩 끼고 비까지 내리는 바람에 언제일지 모를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죄 없는 먼산만 바라보다 서늘한 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예수회 성당으로 잠시 들어가 보았다.


보수 중이었음에도 너무 아름다워 들어서자마자 감탄이 터져나왔다. 부드럽고 하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내부를 수놓고 있던 청초한 핑크빛 장식이 침체되어 있던 영혼을 감싸고 일순간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듯했다. 아, 난 아름다움에 너무 약하다.


루체른 예수회 성당 창문의 아름다운 장식
간절한 기도의 마음을 담은 촛불들
루체른 예수회 성당의 내부 장식과 의자들

순수미가 가득했던 예수회 성당 의자에 앉아 인자한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마음을 놓고 눈을 감는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은 없다. 그냥 한동안 그렇게 있을 수 있다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운치 있는 카펠교

카펠교 주변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하얀 갈매기들과 로이스 강위의 백조들이 오래된 목조 다리의 세월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운명적으로 나의 렌즈를 바라봐 준 이 갈매기는 오늘도 여전히 그곳 하늘을 날고 있을까.


멀리 호프 성당이 보이는 카펠교의 정경


 로이스 강 위로 수상탑의 실루엣이 비치는 카펠교


카펠교 다리 위로 올라가 본다. 삐걱삐걱 나무 소리가 운치 있게 반겨주고 또각또각 행인들의 신발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어우러지는 좁은 길을 걸으며 로이스 강변의 풍경들을 감상한다. 사람들은 모두 천천히 걷고 조용히 이야기한다. 비가 와서 그럴까 스위스라 그럴까.  


나무 지붕이 보듬어주는 아늑한 느낌이 좋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옮기며 감성에 젖어들고 있는데 다리 중간쯤에서 통행금지 표지판이 날 가로막고 서 있다. 보수공사 때문이라는데 끝까지 다리를 건너볼 수 없음이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었다.




빈사의 사자상

사의 사자상은 생각보다 크고 인상적이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물고 있던 튈르리 궁전을 지키다가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는 이 숭고한 조각은 범접할 수 없는 연못 너머에서 여전히 고통스러운 슬픔을 뿜어내고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국의 용병으로 전쟁에 나가야 했던 당시의 스위스인들을 생각하면, 끝까지 목숨을 바쳐 그 자리를 지켰던 그 순간의 마음들을 상상하면 이 사자의 표정에 절로 공감을 하게 된다.


가난의 창인지 전쟁의 창인지 그도 아니면 운명의 창인지 모를 그 창이 사자의 등에 사정없이 꽂혀 있다.  고통으로 뒤틀린 영웅의 표정과 강인한 이빨 사이로 지친 숨을 몰아쉬는 듯 벌어진 입, 잔인했던 발톱이 힘을 잃고 늘어져있는 앞발. 이 사자의 자태가 어째 어쩔 수 없이 삶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고통스럽게 생명을 다 해 가는 듯한 빈사의 사자상


마음속에 한창 애잔함이 번져가고 있던 그때, 한 아이가 식수대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인생이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듯이 나타나 내 얼굴에 다시 미소를 안겨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베기스행 페리

결국 비가 내리고 말았다. 리기산은 아무리 용기를 내어도 못 갈 것 같고 페리는 실내니까 괜찮을 것 같아서 베기스행 페리를 타기로 했다.


베기스행 페리 내부

계단을 올라가면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우아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는 1등 칸이 있다.

비 오는 날엔 실내에서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게 가장 좋다. 맛있는 차와 함께라면 더 좋겠지만 나는 조금 아껴보고자 차는 포기하고 대신 음악을 선택한다.


생각보다 바람이 차지 않아서 밖으로 나와 자리를 잡았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한 루체른호의 정취가 아련하게 일렁거리며 지나간다.


페리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나아가고 풍경은 점차 단순해지고 여백이 많아진다.


비 오는 날 페리를 타고 루체른호를 떠다니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선택이었다. 낯선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인데, 페리에서는 이걸 실컷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바라보고 있으면 욕심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비오는 루체른호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갈매기



베기스에 도착하기 전 정박하는 몇 개의 마을 중 하나다. 보트를 매달아 놓은 주차장이 재미있다.


드디어 베기스에 도착했다. 다행히 비도 멈춰 주었다. 사실 베기스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리기 칼트바트를 거쳐 리기 쿨름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유혹을 느꼈지만 얼마 후 다시 비가 내려 깨끗이 포기했다.


10월의 베기스는 정말 조용하다.  관광객들은 모두 리기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는지 곧 사라졌고 선착장 앞의 이 자리에는 나만 홀로 남겨졌다.


비 오는 날만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니었을까. 안개가 가득한 강가의 그림 같은 풍경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비오는 날의 베기스 선착장 주변


비 오는 일요일의 베기스 마을은 휑했고 상점들은 거의 문을 닫았으며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스산한 분위기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는 시간을 때우며 골목을 조금 돌아다니다 곧 도착하는 다음 페리를 타고 루체른으로 돌아왔다.

 



루체른에서 식사를

내가 머물렀던 HOTEL REBSTOCK 레스토랑의 스테이크.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보름여만에 처음으로 스테이크를 시켰다. 하루 온종일 이동하느라 지친 몸을 위로하고도 싶었고, 날이 저물어 어둑해진 낯선 도시로 나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 큰 맘먹고 스위스의 4성급 호텔 레스토랑에 앉은 것이었다.

전통 레시피로 요리했다는 설명을 보고 반신반의하며 주문했는데 다져서 만든 듯한 고기의 식감이 독특했지만 곁들여져 나온 소스와 매쉬드 포테이토와 어우러지는 맛은 좋았다. 웨이터의 젠틀한 서비스를 받으며 우아하게 칼질을 하고 느긋하게 식사를 즐긴 뒤 내 방으로 올라갔다.


레스토랑 '로시니'의 멜란자네 스파게티. 카펠교 부근 구시가지 쪽 강변에 있는 '로시니'는 우연히 들어가게 된 가게였는데, 다른 가게들은 6시나 7시가 되어야 오픈을 하는데 이곳은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멜란자네는 이탈리아어로 '가지'란 뜻인데 별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멜란자네 토마토 스파게티가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Nero 레드 와인과 곁들여서 먹었던 이날의 이 스파게티는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소스도 맛이 좋았고, 면도 적절하게 익었고 가지와의 궁합도 굉장히 어울렸다. 이후로 나는 집에서 토마토 스파게티를 해먹을 때면 종종 가지를 구워서 곁들이곤 한다.


신시가지에 있는 MANOR 백화점 5층의 셀프서비스 푸드 바. 먹음직스러운 갖가지 요리에 눈을 뗄 수가 없다. 난 타이밍이 안 맞아 음료만 한 잔 하고 나와 아쉬웠지만 스위스의 높은 물가를 생각했을 때, 이곳은 여행자에게 분명 구원의 장소다. 루프탑에는 야외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맑은 날 이곳에서 눈 덮인 알프스를 보며 식사를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다시 한번 HOTEL REBSTOCK이다. 이번엔 조식. 다양한 종류의 빵과 햄, 치즈, 과일, 요거트 등 있을 건 다 있었고, 커피도 커피머신이 아닌 직접 서브해주는 커피였고, 차도 티포트에 정식으로 나왔다. 직원들은 모두 친절하게 먼저 웃으며 다가왔고 늘 필요한 것이 없는지 살펴주었다. 정말이지 매일 아침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풍성한 아침 식사를 만끽할 수 있었던 기대 이상의 호텔이었다.




밤의 루체른

루체른에 밤이 내리면 로이스강을 따라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카펠교의 다리를 이렇게 45도 꺾을 생각은 어떻게 한 것일까. 곡선은 언제나 직선보다 아름답다. 카펠교의 우아한 실루엣이 조명과 함께 로이스강 위로 떨어진다.


은은한 조명을 밝힌 카펠교 다리 위의 사람들


하얀 백조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카펠교의 붉은 지붕


떠나야 할 때가 되자 날이 개이고 멀리 눈 덮인 알프스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요일이라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난 로이스강과 카펠교 주변만을 맴돌며 루체른의 마지막 밤을 채워가고 있었다.


루체른 중앙역에서 신시가지로 이어지는 다리

밤의 루체른은 아름다웠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눈 덮인 산과 유유히 자신의 하루를 마감하며 어디론가 향하는 백조들이 평화로운 밤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축제라도 벌어질 것 같은 유람선이 승객을 기다리는 듯 하지만 사실은 선상 레스토랑이다. 그렇게 밤이 짙어가는 루체른의 강변을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루체른을 떠나며

영원히 그곳에 있을 것 같은 평화...


흔히들 스위스는 재미없고 지루한 곳이라고 말한다. 잠시나마 머물렀던 나 또한 - 아마도 다른 스위스인들이 그럴 것 같은 -  멋쩍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미소'다. 친절했던 사람들이 미소 짓게 하고, 하얗고 뾰족한 알프스의 산들이 미소 짓게 한다. 온통 바쁘게 돌아다니는 백조들과 갈매기들의 예상치 못한 몸짓이, 아름다운 카펠교의 운치가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영원히 그곳에 있을 것 같이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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