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저 모든 게 뿌듯하다
마피아 조직원 같이 위협적인 눈빛을 한 검은 정장의 호텔 프런트맨이 열쇠를 건넸다. 앞으로 3일간 머무를 피렌체의 내 방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좁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부웅'하고 올라가는 몇 초 동안 함께 떠오르는 설렘은 어린 시절 장난감 뽑기의 다이얼을 돌리던 순간을 닮았다. 룸넘버 220이 가리키는 운명을 따라 복도를 지나고 코너를 돌아 다다른 어느 구석에서 드디어 문을 발견했다. 내가 열쇠를 쥐고 있는 바로 그 문.
뽑기의 결과는 나쁘지 않다. 피로로 뭉친 근육을 풀어줄 따끈한 물이 나오고 한 번쯤 뱅그르르 돌아도 떨어지지 않는 널찍한 침대와 온갖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닐 적당한 책상 그리고 적절한 위치에 달린 깨끗한 거울이 있으니 충분하다.
이 방은 어떤 창을 갖고 있을까? 뷰까지 따질 가격의 호텔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긴 피렌체니까, 뭐든 기대가 된다.
삐걱대는 낡은 창틀. 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별 것 없다. 붉은 지붕과 이웃 담벼락, 평범한 빨래들이 전부지만 피렌체스러워 좋다. 이 가격에 이 정도면 훌륭하지. 그렇게 안심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다시 창문을 닫으려고 하기 전까지는.
일단 나무로 된 바깥 덧문의 위쪽 날개가 낡아서 부서져 있고 걸쇠도 말끔하게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안쪽 창문마저 부실하다. 뭔가 이건 좀 아닌데, 싶다. 하지만 지금 마음은 피렌체 거리로 뛰쳐나가자고 난리다. 창문에 대한 거슬림보다 창밖 햇살의 유혹이 더욱 강렬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렇게 나는 헐렁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밤이 되면 어떤 상황으로 변할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대충 창문을 닫고 무심하게 불을 끈 뒤 방을 나섰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보다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감성에 마음이 더 쏠리는 까닭에 피렌체를 향한 기대는 예술적 동경보다는 낭만적 환상에 가까웠다. 메디치 가문의 권력과 업적보다는 따스한 햇살에 색이 바랜 붉은 지붕들 가득한 도시의 얼굴을 만나고 싶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잡은 숙소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아르노 강까지는 2Km 정도. 그 사이에 두오모와 종탑,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전 등을 다 지나게 되므로 꼼짝없이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여행의 오후. 어깨에 크로스백 하나만 매고 가벼운 기분으로 산책을 나선다. 낯선 도시의 골목 안으로, 살아있는 이곳만의 공기 속으로 들어간다. 싸우는 것인지 그저 대화인지 거칠게만 굴러가는 이탈리아 악센트가 귓속으로 파고든다. 현지인 반, 관광객 반. 관광도시 피렌체의 중심 골목은 복잡하고 어수선하다. 그래도 처음으로 걸어보는 이 길이 앞으로 며칠 동안 나와 추억을 쌓아갈 길이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가장 좋은 친구는 '길' 자체다.
길은 좁고 건물은 높아 자꾸만 고개가 올라간다. 위쪽에 특별히 볼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새로운 장소에서는 위를 쳐다보게 된다. 점점 아래로 내려오던 시선은 몰려오는 사람들과 눈 마주치기가 수줍어 또다시 위로 향한다. 이래저래 목이 뒤로 꺾이도록 구경을 한다. 이런 초짜 여행자의 자태를 보고 누가 촌스럽다 핀잔이라도 준다면 그저 하늘을 보는 거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매 순간 새로운 것 투성이인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나에겐 아직 뻔하지 않은 이 길이 너무도 설레는 것을.
그렇게 길을 걸었다. 산 로렌초 성당을 지나, 늘어선 가게들 마다 눈길을 주며, 넋을 놓고 길을 걷다가 마주친 어느 사거리. 갑작스레 툭 하고 나타난 대성당의 자태가 두 눈을 가득히 채웠다. 여러 번 느끼지만 예고 없이 무방비 상태로 만나는 감동이 효과면에선 최고로 극적이다. 심쿵, 아니 심멎. 눈을 뗄 수가 없다. 발도 떼어지지 않는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피렌체의 두오모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펼친 채 앉아있는 여왕처럼 우아하다. 진주빛 외벽 위로 연핑크와 에메랄드 빛깔의 섬세한 조각들이 빼곡히 수 놓여 있지만 화려하다기보다는 은은하고 기품이 있다. 햇살을 머금은 쿠폴라는 붉은 왕관처럼 거룩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미친 아름다움이다.
번화가 한가운데, 비좁은 틈에 그렇게 웅장하고 황홀한 건축물이 서 있는 것이 생경했다. 성당이라는 건축물이 이렇게 눈물 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몹시 혼란스러웠다. 두오모도 믿기지 않았고, 두오모를 보고 있는 나 자신도 믿기지 않았다. 이 방대하고 심오한 아름다움의 우주 앞에서 나는 가슴속에 뜨거움이 왈칵 올라오기도 했고, 일순간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 같기도 했다.
주위를 몇 바퀴나 돌며 피렌체의 두오모를 가장 아름답게 담아보려 수없이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두오모는 자신을 우러러보기만을 허락할 뿐, 어떻게 해도 -이를테면 에펠탑처럼- 전체의 모습을 내어주지 않았다. 어쩌면 온전히 다 담지 못하는 안타까움마저 매력이 되어 우리는 더욱 애타게 두오모를 사랑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할 수 있는 한 두오모를 보러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해서, 아니 일생을 바쳐서 지었을까? 그때가 1436년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16년, 580년이라는 시간의 은하가 흘렀다. 그동안 그들의 한없는 못질보다 더 많은 셔터가 눌러졌을 것이고, 그들의 고된 한숨보다 더 깊은 탄성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저 모든 게 뿌듯하다.
도시의 골목만큼이나 강가를 좋아한다. 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다리도 물론이다. 흘러가는 강물 위로 놓여있는 다리의 풍경은 연인의 허리를 감싸 안은 다정한 팔처럼 낭만적이다. 우피치 미술관 사이의 골목길을 지나 아르노 강변에 도착했다.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강가 난간에 걸터앉아 그들만의 낭만을 -정작 자신들은 훗날에야 이것을 낭만이라 부를 테지만- 한껏 즐기고 있었다. 수학여행이라도 온 걸까. 자유롭고 즐거우며 또 한편으론 지루하고 따분한 피렌체 청춘들의 재잘대는 수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또한 나의 낭만이었다.
아르노 강 위로 날렵한 몸체와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무언가가 움직인다. 강물의 흐름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뻗어나가는 조정 보트의 풍경이다. 내가 가져본 적 없고, 앞으로도 가질 일 없는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겨우 엉덩이 폭 만한 좁디좁은 틈에 앉아 노 젓는 동작까지 하면서도 균형을 잡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조정의 묘미일까? 아르노 강은 조정의 거침없는 리듬으로 조금 더 활기차 보인다.
베키오 다리를 보려고 난간으로 다가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낮은 돌담 같은 난간에 매미처럼 가득 붙어있다. 뒤꿈치를 들고 상체를 최대한 난간에 걸쳐서 고개를 쭈욱 빼 본다. 보인다. 다리 위에 알록달록한 성냥갑을 얹어놓고 판판한 지붕을 덮은 듯한 베키오 다리. 역시 자기만의 스타일이 확실한 다리다. 빈티지한 아우라가 제대로 묻어난다. 베키오 다리를 정면으로 담기 위해서는 산타 트리니타 다리로 가야 하기에 떠날 줄 모르고 가득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지나 다시 강변을 걷는다.
아름다운 아르노 강변. 베키오 다리에서 본 트리니타 다리는 모네에게 그려달라 조르고 싶고, 트리니타 다리에서 본 베키오 다리는 고흐에게 부탁하고 싶다. 늘어선 낡은 파스텔톤 건물들은 오후의 따듯한 햇볕이 감싸고 있고, 그 사이를 한없이 흘러가는 아르노 강의 물결은 잔잔하다. 그 곁에서 내 마음도 함께, 잔잔하고 따듯하다. 문득 여행이 나에게 주는 모든 선물들을 닮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따듯한 햇살 한 조각, 가장 잔잔한 물결 한 조각, 가장 투명한 하늘 한 조각, 가장 상쾌한 바람 한 조각, 가장 달콤한 향기 한 조각, 가장 사람다운 마음 한 조각…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알 수 없는 어느 곳에 조금이라도 배어들었으면 좋겠다고.
10월 말 피렌체의 저녁은 쌀쌀했다. 호텔방으로 들어서니 냉기까지 느껴졌다. 히터를 작동시켜봐도 먹통이고 그렇다고 그냥 있기엔 꽤 추웠다. 프런트로 내려가 방이 너무 춥다고, 히터도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더니, 마피아 같은 분위기의 그가 ‘히터는 11월부터’라는 단호한 선고를 내렸다. 나는 실망만 안고 다시 터벅터벅 방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면 몸이 좀 더워지겠지’하는 생각이었다. 당연히 효과는 잠시 뿐이다. ‘얼른 잠들어버려야겠다’는 것이 두 번째로 생각한 방법이었다.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당겨 관 속에 누운 사람처럼 꼼짝 않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고 애를 썼다.
고요하게 누워있는 방안 어디선가 칼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원망스런 창문을 외면하며 등을 돌리고 몸을 웅크린다. 웅크린 채로 말똥말똥 버티는 동안 냉기는 원망스럽게도 -예정된 수순에 따라- 방안을 가득 점령하고 만다. 히트텍과 티셔츠를 입고 양말까지 신었는데 부족하다. 벌떡 일어나 스웨터에 패딩조끼까지 껴입고 다시 눕는다. 상상인지 꿈인지 모를 어수선한 스토리가 머릿속에서 복작거리다 냉동된 것 같은 딱딱한 아침을 맞이했다. 그렇게 첫날밤을 버텼다.
방을 바꿔달라고 말할까? 근데 마피아 같은 그들에게 뭔가를 부탁하기가 몹시도 불편하다. 갈등하며 하루를 보내는 사이 시간은 재깍재깍 흘러갔고 다시 냉혹한 밤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창문 쪽에 있는 옷장의 문과 욕실의 문을 모두 열어 여러 겹의 방패를 쳐보기로 했다. 그리고 벽이 막혀있는 침대 발치에 가로로 누워서 자겠다고 작전을 짰다. 하지만 마녀 같은 냉기는 어김없이 덮쳐왔다. 이불을 통째로 반으로 접어 그 속으로 쏙 들어가 잠을 청한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놓을 수가 없다. 머리도 시리고 손도 시리다. 새벽 4시쯤엔가 결국 잠이 깼다.
나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지독히도 추운 밤, 나는 정말 왜 그러고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추운 밤 나는 나를 앉혀 놓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스스로의 문제일수록 좀 불편해도 일단 참아보자는 식으로 선택하는 버릇. 나에겐 그게 있었다. 그것도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러니까 닥친 상황을 견디면서 할 수 있는 만큼 혼자 해결해보려는 일종의 본능이 있는데, 정작 거기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 머리가 아닌 내 ‘몸의 본능’이었다. 그건 내가 다 모르는 나였고 그래서 내가 그러고 있었다는 걸, 스스로도 이해가 안되고 말이 안될지 몰라도 그냥 그것도 ‘나’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너는 이런 사람이구나.’ 그 새벽 나는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다음 날, 마지막 1박을 남겨두고 나는 프런트로 가서 방이 너무 춥다고 얘기를 꺼내보았다. 여전히 시큰둥한 어투로 내 얘길 듣던 불친절한 직원들은 얼마간 대화를 주고받더니 다른 열쇠를 하나 꺼내 주었다. 이것이 유일한 대안이고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더 이상은 귀찮게 하지 말라는 강력한 눈빛을 쏘아댔다. 바뀐 방은 모든 게 정상이었다. 역시 나는 미련했던 것이다.
지극히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일들 앞에서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미련할지 모른다. 추운 날씨에 고장난 호텔 창문을 받아들이는 일이야 다시 없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또 무언가를 붙들고 쓸데없이 시간을 견디며 살아갈 것 같다. 그럼에도 까닭을 몰라서 혹은 자기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서 자책하는 일만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단지 그게 나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캐리어를 열고 옷더미를 뒤적거렸다. 우피치 미술관 예약확인서를 찾기 위해서다. 예약 시간은 오전 9시. 티켓도 교환해야 하니 일찍 도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넉넉하게 8시에 출발한다. 아침의 두오모를 지나고 한적한 시뇨리아 광장도 지난다. 상쾌한 기분으로 우피치에 도착했으나 벌써 1.5Km의 산책을 마친 두 다리에게 2,500여 점의 작품을 보자고 하는 것은 무리인 듯했다. 사실 르네상스 회화에 심취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미술관이기 이전에 우피치 궁전이었다는 이 건축물과 공간 자체가 나에겐 더 큰 예술품이었다.
우피치(Uffizi)는 영어로 바꾸면 오피스(Office)로, 우피치 궁전은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메디치 가문의 집무실이었다고 한다. 이름의 뜻을 알고 다시 한번 ‘우피치 미술관’이라고 말해보니 영 김이 새는 것 같다. 그래도 예술을 사랑한 권력자 덕분에 이탈리아는 많은 것을 얻은 셈이다. 권력자가 무엇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많은 것을 좌우한다.
프랑스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만은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우피치에서도 몇 가지 목표는 있었다. 바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우피치 관람은 이 두 작품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는 셈이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 시대 순으로 동선을 짜 놓은 수많은 전시실을 들락날락하며 아마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한 가치를 지닌 예술품들을 스쳐 지나친다. '그래 너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수백 년 동안 벽에 걸려 있었을 듯한 회화 속 생생한 주인공이 내게 말하는 듯하다.
보티첼리의 두 작품은 물론 아름다웠다. 직접 눈으로 본 것과 안 본 것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답답한 전시실보다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는 복도가 좋았고, 수준 높은 회화보다 피렌체의 풍경이 보이는 창문이 더욱 맘에 들었다. 여행을 하며 갖가지 선택의 상황에서 내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를 발견하는 것도 퍽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다 몰랐다는 사실은 덤이다.
우피치의 창밖으로 보이는 두오모가 반갑다. 좀 높은 곳에선 언제나 두오모를 찾게 된다. 두오모를 볼 때마다 ‘넌 지금 피렌체에 있어’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피렌체에 와서 처음으로 버스를 타본다. 여행을 가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마치 그곳 사람들의 일상으로 들어가 보는 것 같아서 괜히 설렌다. 버스정류장 앞 간이매점 같은 조그만 판매소에서 승차권을 사는 일조차도 재미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뭔가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웃음이 난다.
기다리던 12번 버스가 도착했다. 두어 개의 계단을 올라 종이 승차권을 기기에 인식하면 찌지직 하고 탑승시간이 찍힌다. 앞으로 90분 동안 유효하다. 이제 편안히 앉아 미켈란젤로 언덕을 향해 출발.
버스 안은 의외로 한산하다. 미켈란젤로 언덕이 야경으로 유명해서 그런가. 아무리 오전이라도 그쪽으로 가는 버스가 이것뿐일 텐데 관광객이 별로 안 보인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앞에서 출발한 버스는 피렌체의 평범한 거리를 지나 아르노 강을 건넌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아르노 강을 바라보는 이런 사소한 순간을 사랑한다. 버스는 구불구불 달리며 정차했다가 또 달린다. 미켈란젤로 언덕에 도착하기 한 정거장 전, 내리는 문이 닫히려는 순간 나는 갑자기 버스에서 내렸다. 그냥, 조금 걸어도 좋을 것 같은 길이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작고 예쁜 꽃들이 아름다워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햇살이 내려앉은 꽃잎의 빛깔이 다정했다. 화창한 하늘도 모든 것을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내가 그렇게 여행을 하고 그 순간 작은 꽃에 감탄하는 이유까지도.
드디어 미켈란젤로 언덕에 도착. 언덕 끝 전망대까지 다가가 탁 트인 풍경을 한눈에 담는 순간, 간절히 찾던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아, 이거였구나!’ 하는 마음. 빛바랜 붉은 지붕들 사이로 아르노 강의 곡선이 아름답게 휘어져 내리고 우뚝 솟은 두오모의 쿠폴라와 베키오 궁전의 종탑 너머로 병풍 같은 산과 바다 같은 하늘이 펼쳐진다. 구름은 미소를 띠고, 바람은 노래를 부른다. 마음이 활짝 열리고 눈이 반짝 빛난다. 그 순간까지 피렌체 여행이 어땠는지 아무래도 좋았다. 이거 하나로 모든 것이 상관없어지는, 모든 것을 역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게임에서 이긴 것 같은 느낌.
전망대에서 왼편으로 난 계단은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가장 낭만적인 장소다.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며 또 하나의 충격적인 아름다움을 열심히 기억에 담으려 애를 썼다. 그러려고 앉았는데 어쩌다가 몇 번이나 커플들의 사진을 찍어주게 되었다. 프레임에 고정된 몇 초 전의 찰나를 보며 그들도 웃고 나도 웃는다.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돌아가는 길에도 한 정거장을 걸었다. 작은 성당이 보여서 그리고 숲도 보여서 무심코 걸음을 향했다. 평화로운 분위기의 정원이 한참 이어진다. 키 높은 나무들이 연둣빛 잔디 위로 서 있고, 햇살은 곳곳에서 쉬고 있는 벤치 위로 쏟아진다. 아직 여유로운 오후 시간. 천천히 천천히 길을 따라, 안으로 안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수도원과 마당을 지나 도착한 곳에 아름다운 성당이 나타났다. 바로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이었다.
성당의 내부는 묘한 녹색빛이 감도는 대리석이 사방을 두르고 있어 묵직한 분위기다. 하지만 천장과 벽면, 바닥과 기둥 등의 문양과 색채의 미는 탁월함 그 자체다. 오히려 어둡기 때문에 높은 곳으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빛의 효과가 더욱 은은하고 아늑했던 것 같다.
성당 밖으로 나오니 다시 한번 피렌체의 전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을 통해 옆길로 올라왔던 나는 별 생각이 없던 차여서 또 그렇게 감탄을 했다. 미켈란젤로 언덕보다 더 높은 지대라 좀 더 하늘이 많이 보인다. 이곳을 모르고 갔으면 어쩔 뻔했을까. 성당 앞 테라스를 거닐면서 평화로움과 아름다움만이 사랑스럽게 주어진 이 시간에 한없이 감사했다.
피렌체에 도착한 첫날, 간단히 허기를 달래러 작은 가게에 들어갔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파는 카페인데 느낌은 편의점이다. 커피만 한 잔 할까 하다가 진열대 속의 샌드위치로 눈을 돌린 순간, '저것도 주세요'라며 이미 입이 알아서 주문을 하고 있었다.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어서 와 예쁜이, 뭐가 필요해?' 하며 웃음을 흘리던 주인은 넘치도록 싹싹하고 친절했다.
테이블에 앉아 마요네즈와 데리야끼 소스가 과다하게 발린 납작한 샌드위치를 씹으며 카푸치노를 들이켰다. 그 사이 활짝 열려있는 출입문으로 늘상 드나드는 듯한 이웃들이 잠시 왔다 수다를 나누고 돌아가곤 했다.
계산대 앞에 서서 샌드위치와 커피 가격 4유로를 꺼내려는데 주인이 8유로를 달라고 한다. 테이블에 앉아서 먹으면 4유로를 더 내야 한단다. 이탈리아에 'copèrto', 즉 자릿세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음식값의 두배가 되니 묘하게 억울한 감이 들었다. 한국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시켰다면 8천 원이 나올 수도 있으니 여기선 거꾸로, 먹고 가더라도 앉지만 않으면 자릿세만큼 깎아주는 것일 수도 있다. 생각을 정리-아니 합리화-하고 있는 사이 주인이 냅킨에 싼 빵을 하나 건넨다. 옆구리에 칼집을 내어 생크림을 채워 넣은 크로와상이다.
"서비스야, 내일도 오면 더 맛있는 거 서비스로 줄게." 고객의 부정적인 판단 경로를 얼른 바꾸려는 그의 센스는 충분했지만, 아쉽게도 과하게 뿜는 자본주의 미소에 묻히고 만다. 그것이 몇천 원에 대한 탐욕인지, 자신의 일에 대한 서툰 열정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가게를 나와 골목을 걸었다. 손에 쥐고 있던 '서비스' 빵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며 하얗게 웃고 있었다.
레푸블리카 광장에 있는 리나센테(Rinascente) 백화점 5층에는 전망 좋은 루프탑 카페 '라 테라짜(La Terrazza)'가 있다. 어느 도시를 가든 백화점 루프탑 카페는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이곳 테이블에 앉아서 두오모와 눈높이를 맞추고 식사를 하면 엔돌핀이 절로 솟아난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식사만큼이나 말이다.
메뉴판을 보고 헤매다 '멜란자네'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멜란자네 알라 파르미지아나(melanzane alla parmiggiana)'를 가리키며 어떠냐고 물었더니, 서버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very good"이라고 확신을 더해 주었다. 멜란자네는 가지란 뜻인데 유럽에서 가지 요리는 늘 성공적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쫄깃하고 짭짤한 치즈와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가지가 새콤달콤한 토마토소스와 어우러져 입안을 채우는 풍미가 음-하고 눈을 감게 만든다. 바게트 조각을 소스에 찍어 한입 베어 물면 바삭, 하는 소리가 음악처럼 귓가를 간지럽힌다. 이 한 끼의 식사가 오늘 하루를 행운의 날로 만들어준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주로 먹게 되는 메뉴로는 피자와 파스타, 스테이크와 햄버거 그리고 샐러드가 있다. 하지만 오래 여행을 하다 보면 이 모범적 요리들에 대한 애정이 시들해지기도 한다. 마음속에서 이런 메뉴들을 유난히도 밀어내던 그 날 저녁, 우연히 한 인도 레스토랑을 찾게 되었다. 맛집도 아니고 그냥 숙소 앞 작은 가게였다. 유명 레스토랑과는 다른 소박하고 조용한 분위기 사이로 들릴 듯 말 듯 인도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저녁과도 제법 어울리는 것이 잘 들어온 것 같았다. '치킨 티카 마살라(Chicken Tikka Masala)'라는 낯익은 메뉴를 보고 자신 있게 주문을 하고 찍어먹을 난(Naan)도 추가했다. 커리는 손바닥만 한 냄비 같은 그릇에 담겨 나왔다. 접시와 나이프와 포크... '이런 것들이 왜 있지?' 싶던 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찢은 난을 손에 들고 숟가락으로 커리를 올려 먹었다. 이국적인 마살라 향이 감도는 붉은 커리의 매콤함이 입맛을 당긴다. 작은 냄비 가득 들어있는 불맛 나는 치킨도 정신없이 건져먹는다. 이날 저녁의 인도 요리는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카페 질리에 들어서면, 높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샹들리에의 오렌지 불빛이 은은하게 공간으로 내려앉는다. 짙은 갈색의 앤틱가구들은 시간의 여정을 증명하듯 아름답게 낡아있고, 쌉쌀하고 깊은 커피 향은 벽지처럼 강렬하게 스며있다. 민낯의 원목 테이블에 자리를 하면 로베르토 베니니처럼 생긴 나이 지긋한 웨이터가 다가와 까슬까슬한 아이보리색 테이블보를 깔아준다. 창밖에는 레푸블리카 광장이 있고, 나와 레푸블리카 광장 사이에는 이웃 테이블 사람들의 조용한 대화가 있다. 그리고 찻잔이 접시에 조심스레 내려앉는 소리, 티스푼이 커피를 휘저으며 찻잔 바닥을 긁는 소리, 또 분주하게 오가는 웨이터의 까만 앞치마가 스치는 소리가 있다.
습관처럼 시킨 카푸치노와 이곳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티라미수는 궁합이 어긋났지만 덕분에 오래 앉아 있게 되었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는 평화롭게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첫눈 밟듯 조심스레 티라미수 그릇에 스푼을 푹 넣을 땐 설레기까지 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크림과 진한 커피맛이 미소를 불러낸다. 티라미수(tiramisu)의 뜻처럼 '나를 들어 올리는' 맛. 다른 건 몰라도 입꼬리는 무조건 들어 올린다.
피렌체에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두오모 앞에 있었다. 쿠폴라의 붉은 지붕 위로 붉은 노을이 겹쳐지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낮부터 생각하곤 했다. 노을은 종탑 꼭대기에 불을 붙이고 타오르다 천천히 두오모의 곳곳을 애무하고 사라진다. 고개를 젖힌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관객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나도 그만 숙소로 향한다.
집으로 향하는 자전거 페달의 리듬이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고 노래를 부른다. 나는 슈퍼마켓에 들러 생수 한 병과 과일 몇 개를 산다. 비닐봉지를 들고 익숙한 귀갓길 골목을 걷는다. 아담한 청소차가 파우더 브러시 같은 솔을 두 개나 달고 돌바닥을 맨질맨질하게 문지른다. 아, 귀여워. 발이 멈춘다. 어릴 적 소독차를 쫓아다니며 깔깔거렸던 추억 때문인지 청소차가 지나가는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하지만 오늘은 뜬금없는 시도를 같이 할 친구가 없어 안 되겠다.
느릿느릿 한 걸음 두 걸음 걸어간다. 지금이 피렌체의 마지막 저녁, 이라고 되뇌이며. 그렇다고 춤을 추러 갈 것도, 술을 마실 것도 아니다.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특별해서 그러는 것이다. 유럽여행을 시작한 지 23일째다. 피렌체는 여덟 번째 도시, 여덟 번째 마지막. 이렇게 잦은 처음과 마지막을 반복해보는 것도 태어나 처음이다. 처음과 마지막에 길들여지는 것. 여행은 그렇게 처음과 마지막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한결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 갖지 않아도 내 것으로 삼고 살 수 있는 자유를 가르쳐준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걸 도저히 어찌할 수 없던 심장을 말랑말랑하게 녹여준다. 여행이 그렇다는 걸 나는 피렌체에서 마지막 저녁을 걸으며, 보내며 배운다.
피렌체의 평범한 일상을 보며
오히려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돌아오는 길에 탔던 버스가 이상한 길로 빠지기 시작했다. 왔던 길 반대편에서 타면 똑같이 되돌아 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버스는 점점 낯선 곳으로 향하더니 한참을 외곽으로 돌았다.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불안해 의자에서 등을 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버스는 점점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장난스런 중학생들과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체크무늬 셔츠 청년, 짙은 아이라인으로 한껏 멋을 낸 아가씨와 시끄러운 피렌체 아주머니들. 두오모 앞에서 볼 수 없었던 평범한 일상을 보며 오히려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창밖의 풍경에 화려한 르네상스는 없었다. 대신 그토록 바랬던 도시의 얼굴이 있었다.
피렌체는 유명한 장소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어 하루에도 몇 Km씩 걸어 다니곤 했다. 거기서 거기만 뱅글뱅글 돌아다니던 내게 그 버스 여행은 뜻밖의 행복이었다. 눈동자의 황홀함에만 취해있던 나를 데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잠시나마 피렌체의 얼굴을 보게 해 준 우연이 감사하다. 때로는 잘못 들어선 길에서도 행운을 만난다. 어쩌면 여행에 있어 잘못된 길이란 애초에 없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