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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주아 May 11. 2016

생폴 드 방스의 오후

 내가 걷는 이 골목길을 샤갈도 걸었던 건 아닐까

생폴 드 방스를 찾아서

'생폴 드 방스'라는 이름은 참 따뜻하다. 하얀 햇살 아래 파스텔톤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있고 초록의 들판 위로 살랑거리는 바람이 싱그러운 그런 곳일 것만 같다. 니스에 숙소를 두고 남프랑스 마을을 느낄 수 있을만한 이곳저곳을 둘러보리라 했던 것이 원래 계획이지만, 야심찬 계획은 보란 듯이 흐린 하늘 먹구름 뒤로 날아가버렸고 비가 개인 어느 날 오후, 잠깐이나마 생폴 드 방스에 다녀올 수 있었다.    


니스에서 출발한 400번 버스가 언덕 위의 작은 마을을 향해 달린다. 차 창 밖으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생폴 드 방스의 풍경은 그림을 옮겨놓은 듯 아름답다. 아담하고 둥근 나무들과 길쭉하고 키 큰 나무들이 연두색인지 녹색인지 이름을 다 말할 수 없는 다채로운 초록색으로 어우러져 풋풋함을 자랑하고 있다.




생폴 드 방스 마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이 아치를 통과하면 동화 같은 작은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에 걸음은 자연스레 느릿느릿 느려지고, 아득히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에 절로 눈이 감기는 평화로운 곳이다. 자잘한 돌들이 아름다운 문양을 그리며 박혀있는 오래된 길을 따라 나는 가벼운 산책을 시작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카페 앞 공터에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다. 굵직한 나무가 기둥이 되어주고 풍성한 잎사귀들이 천장이 되어주는 자연의 놀이터. 어른들은 모두 아이들을 바라보지만, 아이들은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듯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돌이켜보면 이날은 날이 참 좋았고, 이 사진을 찍으며 나는 참 행복했던 것 같다.


생폴 드 방스는 워낙 유명한 곳이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기자기한 가게가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예술 작품을 판매하는 상점들도 꽤 많았고 구경거리들이 즐비했지만 나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더 궁금했다. 비슷한 듯 다른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오곤 했지만 집집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갖가지 장식들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런 건물들은 대체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내가 걷고 있는 이 골목을 샤갈도 걸었던 것은 아닐까. 이 담벼락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을까. 질문이기도 하고 감탄이기도 했던 이런 생각들을 하며 계단을 오르고 코너를 돌아 또 걷고 걸었다.




생폴 드 방스의 속살

관광객을 상대로 문을 열어놓은 가게 말고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런 것이 더 궁금했다. 누구라도 문을 열고 나온다면 이런 곳에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하고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그저 오래된 담벼락을 따라 풍성하게 피어난 담쟁이넝쿨을 오랫동안 바라보았고, 집집마다 창에 달려있는 이국적인 덧문에 마음을 빼앗겼다.


대문이 똑같은 집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 -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 문을 직접 만들어서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이드가 없는 여행은 궁금증 투성이이긴 하지만, 때로 온갖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에 나름 재미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대문들이 너무나 개성이 넘치고 예뻤다. 아마 마음먹고 사진을 찍어 모았다면 수십 장의 컬렉션을 이루지 않았을까.


자전거가 있는 생폴드방스의 어느 대문 앞




생폴 드 방스에서 만난 순간

그렇게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 어느 철문 너머로 고상하게 앉아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자신은 알리 없는 완벽한 구도 아래 자리를 잡고 있는 고양이 뒤통수를 보며, 난 부디 고개를 좀 돌려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것도 오른쪽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정말 거짓말처럼 휙 하고 고개를 돌리는 거다. 바로 오른쪽으로!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나는 홀로 너무나 기뻤다. 무심한 듯 시크했던 고양이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저 자리가 참 좋았던 모양이다.


높은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은 푸르고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이때는 10월이었지만 여전히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래도 가을은 가을인지라 잎들을 모두 떠나보낸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종종  나타나곤 했다. 섬세한 가지들이 자유롭게 엉켜있는 모습측은하면서도 운치 있어 보였다. 이건 흑백으로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프레임 가득 담아보았다.


높은 지대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다 우연히 발견한 연인의 풍경. 아무리 아름다운 생폴 드 방스라 해도 연인의 얼굴보다 오래 보고 싶을 리 없다. 회화 같은 풍경과 어울리는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실루엣 그리고 눈부신 오후 햇살에 비스듬히 늘어지는 그림자가 더없이 생폴 드 방스적인 순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들의 꿈같았던 시간은 그렇게 나의 사진 속으로 들어와 멈추어 있다.




생폴 드 방스 둘레길

붐비는 걸 싫어하는 나는 북적거리는 골목을 빠져나와 잠시 성벽을 따라 둘레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마을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가끔씩 새소리가 들려올 뿐 고요한 정적만이 감도는 길을 걸으며 담벼락과 대문, 자동차와 자전거 같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져본다.


성벽이 낮아지자 건너편 언덕의 마을이 보이고 성벽 너머로 탁 트인 생폴 드 방스의 풍경이 펼쳐진다. 낮은 담장에 두 팔을 얹고 하염없이 바라본다. 오렌지색 지붕이며, 무성한 초록 나무들의 행렬과 파란 하늘을. 살랑살랑 바람이라도 불어와서 머리칼을  쓸어주기라도 하면 바랄 것 없이 행복한 기분이 든다. 아주 잠시일지라도 말이다.    



골목 안 상점들은 관광객들 맞이하느라 바쁜데 둘레길의 아뜰리에는 한산하기만 하다. 이런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삶이라... 상상만 해도 부럽다. 생폴 드 방스는 심심한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곳은 아닌 듯 하지만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감탄할 일로 가득한 곳이 분명하다.

 



쉬어가기

유명한 레스토랑도 있다지만 니스에서 잠시 소풍으로 온 내게는 젤라토 하나면 충분하다. 새콤한 젤라토를 맛보며 적당한 자리에 걸터앉았다. 15분쯤 될까. 젤라토 하나를 다 먹는 동안 나는 걸터앉은 돌난간의 촉감을 느끼거나 길가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들을 감상한다. 넋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다 젤라토가 녹아 손가락까지 흘러내렸다. 얼른 한입 베어 물고는 다시 오가는 여행객들을 구경한다.


골목을 열심히 걸어 다니다 빠져나오면 다시 만나곤 했던 분수대. 티셔츠가 젖든 말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속을 들여다보는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어린아이가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모습은 늘 경이롭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런 벅찬 느낌을 갖기 어렵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태어나 처음 보는 것 투성이가 되고 다시 한번 빛나는 눈빛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빛나는 눈빛. 그것은 여행이 나에게 준 최고의 값진 선물 중 하나였다.

     



생폴 드 방스를 떠나며

골목길과 대문, 돌담과 오렌지색 지붕들,
올리브 나무와 고양이, 햇살과 바람 그리고 새소리...


몇 시간 남짓되는 작은 소풍이었던 생폴 드 방스.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었더라면 매그재단이나 샤갈의 무덤에도 다녀올 수 있었을 테지만, 난 그냥 느리게 걷고 충분히 느끼는 쪽을 택했다. 골목길과 대문, 돌담과 오렌지색 지붕들, 올리브 나무와 고양이, 햇살과 바람 그리고 새소리... 내가 만난 생폴 드 방스는 이런 것들이었고 지금 나는 눈만 감으면 언제라도 그 한적한 공기가 떠다니는 평화로운 산책길 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니스에서부터 함께 버스를 타고 출발했던 얼굴들을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만났다. 다들 생폴 드 방스라는 작은 마을을 둘러보는데 걸리는 시간이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내용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그들도 그날의 생폴 드 방스를 가끔 떠올릴 테지. 바로 지금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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