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래도 너무 예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제네바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안시. 제네바 중앙터미널에서 출발한 시외버스가 프랑스의 시골길을 따라 구불구불 달린다. 눈을 감기엔 너무나 아까운 예쁜 풍경들이 펼쳐져 잠을 잘 수가 없다. 프랑스는 온 나라가 다 아름다운 것인지 외떨어진 이런 곳마저 마음을 빼앗는다.
안시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타난 걸 보니 다와 가는 모양이다. 처음 만나는 도시를 향해 가는 마음은 언제나 설렌다.
안시 역은 매우 현대적이고 깨끗하다. 숙소까지는 걸어서 15분쯤 가면 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고 숙소를 잘 찾아가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안시의 황홀한 밤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안시에서 이틀 밤을 지낼 숙소는 IBIS 계열의 호텔로 정했다. 전망이 좋은 위치로 달라고 해서 얻은 이 방은 꽤 괜찮은 발코니를 갖고 있었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 그다지 활용하지는 못했다. 10월 중순의 기온이 영상 3도쯤이었던 것 같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오니 벌써 어둑해졌다. 릴르성(Palais del’isle) 주변의 번화한 거리에서 적당한 레스토랑을 골라 저녁식사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슬슬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차다. 하늘 가득 구름이 덮여있어 노을빛이 번지는 안시의 풍경도 볼 수가 없다. 오늘 저녁은 여러모로 조건이 안 좋은 상황이지만 안시의 올드 타운은 그에 굴하지 않고 마음껏 아름다움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중세 마을의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자그마한 티우 운하의 곡선을 따라 서있고, 은은한 가로등 불빛들이 여인의 귀걸이처럼 반짝인다.
불빛들은 다시 물 위에 반영되고 물결 위에서 춤을 춘다. 조용한 안시의 밤 한 가운데서 내 마음만이 들썩들썩 축제를 열고 있다.
10월 중순의 안시는 비수기가 확실한가 보다. 북적이는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고 레스토랑은 문을 연 곳이 있기만 해도 고맙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겨우 7시쯤 되었을 뿐인데 골목길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하다.
아, 그래도 너무 예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얼마나 더 여행을 해야 이 말이 안 나오려는지 난 여전히 매번 놀라고 또 감탄한다.
안시의 아침. 날은 여전히 흐리다. 햇살을 받으면 더욱 빛을 발할 텐데 못내 아쉽다.
릴르성 주변까지 걸어오니 사람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한다.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사진을 찍는다. 니스에서 장갑을 샀어야 했는데 거기선 왠지 마음이 느긋해졌던 탓에 이제와 후회를 한다.
안시 사진을 검색하며 가장 많이 보았던 릴르성. 12세기에 지어졌을 무렵에는 거주지로, 이후엔 행정 관청으로, 2차 세계 대전 때 감옥으로도 사용하다가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는지 물이 많이 빠져 바닥이 드러나려 한다.
빛을 받으면 초록색을 드러내는 티우 운하. 저녁에는 많이 보이지 않았던 백조들이 어느 새 나타나 제 각각 바쁘게 돌아다닌다.
릴르성을 지나 산책을 이어갔다. 티우 운하를 따라 걷다 보니 눈 앞에 산이 하나 나타났다.
안시 올드 타운만 알고 왔던 나는 무작정 걷다 안시호를 마주하고는 너무나 감격하고 말았다.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저 산은 알프스의 일부였다. 이렇게나 춥고, 이렇게나 날씨가 엉망이고, 이렇게나 손이 시린데도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모든 불편과 조건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이다.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오는 환상적인 곳이다.
알프스 산의 풍채는 보일 듯 말 듯해서 더욱 미련을 남긴다. 프랑스와 호수 그리고 알프스가 공존하는 지점이 안시호다. 그 조합이 주는 묘한 분위기가 참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리 많은 여행을 다니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본 호수 중에서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호수라 여러모로 나에게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고요하고 넓은 수면은 마음의 모든 동요를 잠재우고, 웅장하게 지켜보고 있는 알프스 산자락은 흐트러졌던 수많은 다짐들을 다시 굳건하게 세워준다. 역시 흐린 날의 묘미는 같은 것을 보아도 감동의 색채가 남다르다는 데에 있다.
사랑의 다리를 찾아가기 전 지나게 되는 유럽 공원. 안시 올드 타운이 아기자기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에 반해 공원과 호수는 널찍널찍하다.
넓은 공원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이지만 역시나 한산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하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은 도처에서 유혹하지만 가죽재킷을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지난다. 날씨 좋은 날이면 이곳에서 피크닉을 하겠지 하며 말이다.
사랑의 다리로 향하던 중 유치원으로 보이는 건물을 만났다. 닫힌 교문 철창 너머로 아이들을 살펴보려는데 한 소녀가 내게로 달려온다.
금발의 인형같이 예쁜 소녀는 문 앞 가까이에서 멈춰 서더니 벽 뒤로 숨어버렸다. 잠시 후 얼굴을 빼꼼히 드러내길래 난 미소로 인사를 건넸고 소녀는 다시 벽 뒤로 숨어버렸다. 호기심과 경계심을 오가며 그렇게 한동안 나와 밀당을 하던 소녀는 잠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 역시 시크한 프랑스 소녀답게 - 웃으며 화답해주는 친절 따위는 없이 친구들에게로 돌아가버렸다. 어머니가 누구신지 물어보고픈 앙증맞고 귀여운 패션까지 아무리 보아도 이 유치원의 최고 미녀가 아닐까 싶다.
다리 이름이 'PONT des AMOURS', 사랑의 다리라니...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다리가 이곳 안시에 있었나 보다. 다리 위로 올라가 보니 한쪽으론 안시호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다른 한쪽으론 좁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나무들이 가득 잎을 늘어뜨리고 있다.
사랑의 다리 위에서 바세 운하 쪽으로 본 풍경. 이 자리에서 감탄을 하며 서 있는 잠시 동안 몇몇 커플이 키스를 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는 지나간다. 그들의 사랑을 응원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만큼은 연인이 아닌 삶에 대한 사랑을 갈구해본다. 그리고 이렇게 곳곳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과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은 그러한 나의 갈구를 선명한 희망으로 바꾸어 주고 있다.
사랑의 다리에서 내려와 운하를 따라 걷는다. 작은 보트들이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한가로워 보인다. 빽빽한 빌딩 숲과 아파트, 아스팔트와 교통체증만 보아왔던 나의 두 눈에 실컷 다른 세상을 담는 중이다. 그런 풍경도 있고, 이런 풍경도 있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그 길도 있고, 다른 길도 있다. 우리 삶에는 선택의 기회가 있는 것이다.
안시에 도착한 첫날 저녁, 두어 테이블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들어선 어느 레스토랑. 라자냐를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중에 옆 테이블로 70대쯤 되어 보이는 노부부가 자리를 잡았다. 우아한 어투의 프랑스어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신중히 메뉴를 고르신다 싶었는데 내 라자냐가 나오고 그릇이 반 이상 비워져 갈 때쯤에야 결정을 하고 주문을 하신다.
애피타이저, 메인 요리, 디저트와 와인까지 코스를 갖추어 깐깐하고 꼼꼼하게 말하면서도 서두르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웨이터가 돌아가고 고개를 돌리던 노신사와 눈이 마주쳤다. 멋쩍은 미소로 서로 인사를 하고 식사를 계속한다. 그분들의 시각에선 내 모습이 독특했을지도 모르겠다.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인 여자가 안시의 레스토랑에서 혼자 라자냐를 먹고 있는 풍경. 두 분의 대화 속에 내가 등장했는지는 모르지만 인자한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무언가 격려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내 멋대로 해석해보자면 그것은 젊음에 대한 응원 같은 것이었다.
그분들이 애피타이저로 시킨 햄과 살라미 몇 점을 드실 때쯤 난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는 시종일관 나누는 잡담에 몰두하느라 서빙이 부수적으로 보일 정도였고 라자냐의 맛은 그럭저럭 먹을 만한 정도였지만, 그 노부부 덕분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레스토랑이다.
IBIS Annecy 호텔의 조식. 깔끔하고 경쾌한 인테리어를 갖춘 공간에서 전형적인 조식 메뉴를 제공한다.
안시 역을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노보텔 호텔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현대적인 복합 쇼핑몰이 나타난다. 모노프릭스에서 물과 음료수를 사고 브리오슈 도레에서 샐러드와 빵을 사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파리와 니스에서도 자주 들렀던 곳이지만 가격도 부담 없고 맛도 좋아서 여러모로 항상 만족한 곳이다.
낮부터 흐렸던 이날은 결국 저녁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귀차니즘을 극복하고 6시쯤 숙소에서 나와 홍합 요리로 유명한 이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두어 명의 남성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여 문을 열고 들어가 장사하는 거 맞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저녁 식사되냐고 다시 물으니 그건 7시에 시작한다고 답한다. 난감해하는 나의 표정을 보더니 날씨도 추운데 이리로 와서 와인 한잔 하며 기다리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그들의 친절한 제의가 정겹고 고마웠지만, 낯선 이들의 초대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나중에 오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돌아섰다. 숙소로 돌아와 7시를 기다리긴 했지만 나른해진 탓에 그냥 눌러앉고 말았다. 그들과 어울려 어색한 대화라도 나누어 보았다면 어땠을까, 그 집의 홍합요리는 맛이 좋았을까... 이런저런 미련들을 머릿속에 굴리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소박하고 예쁜, 아름답고 감성적인
황홀하고 경이로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작은 마을
흐린 날 혼자 하는 여행은 멜랑콜리한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차가운 공기에 손가락이 얼어버릴 것 같았던 10월의 안시는 가장 아름다운 매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특별한 추억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안시를 떠나 다시 제네바로 향하던 버스에서 난 여전히 눈을 감지 못했다. 소박하고 예쁜 풍경은 프랑스 자체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언젠가 다른 지역들도 꼭 가봐야겠다는 다짐을 일으켰다.
물론 파릇파릇한 초록잎이 싱그러운 초여름의 안시도 다시 찾고 싶다. 하지만 안시로 향하는 여행자들 중 날씨 운이 좀 안 좋은 경우가 있다 해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모든 곳을 걸어서 즐길 수 있는 아담한 도시인 안시는 현대적인 쇼핑몰과 숙박시설부터 15세기 중세 유럽의 예술적인 건축물들과 수많은 아치가 이어주는 골목길, 알프스 산과 안시 호수, 사랑의 다리와 감성 돋는 작은 운하들, 푸른 공원과 맑은 공기까지 매력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넘치는 곳이니까. 미인이 미소를 조금 거두었다고 해서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