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축제였다!
지중해의 짙고 푸른 바다가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파리에서 출발해서 오를리 공항을 떠난 지 불과 1시간 남짓 지났을 때다.
드디어 '니스'에 도착했다!
파리가 너무 흔해 별 기대 없이 갔다가 반했던 곳이라면 니스는 내게 늘 동경의 여행지였다. '지중해'라는 단어는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졌고, 소설이나 여행기 속에 등장하는 '프롬나드 데 장글레'도 너무나 멋질 것 같았다. 파리를 떠나야 해서 안타깝고 아쉬웠던 마음은 간사하게도 온통 니스로 물들어 두근대기 시작했다.
한낮의 햇살이 가득한 호텔방. 발코니 창밖으로 다 시들어가는 야자수 나무가 우뚝 서 있는 정원이 보인다. 호텔방에 들어왔다기보다는 니스에 사는 지인의 집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이다. 욕실은 넓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욕조까지 있다. 비수기의 여행은 단돈 60유로에 이런 호사를 허락한다.
옷장을 열고 캐리어 속에 구겨져 있던 옷들을 꺼내 걸었다. 한동안 가죽재킷을 입을 일은 없을 것 같다. 가볍게 트렌치코트를 걸친 뒤 호텔을 나섰다.
니스의 바다를 보러 가기 전 거치게 되는 마세나 광장. 처음 봤을 때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인체 조형물들이 이곳의 수호자들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검색해보니 스페인의 설치 미술가,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의 작품, [Conversation à Nice]라고 한다. 7개의 좌상들이 대화하는 테마라는데, 정돈된 자세 탓인지 민머리여서 그런지 동양적인 느낌과 함께 독특한 기운을 뿜어낸다.
높은 건물이 없는 탁 트인 하늘과 아름다운 건축물들 그리고 천천히 지나다니는 트램까지 모든 것이 여유롭다. 딱 봐도 부유함이 흘러넘치는 세련된 여행객들도 많이 보인다. 참으로 도시마다 다양한 색깔을 지녔고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분수 너머로 니스의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니스의 바다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세나 광장에서 해변으로 향하다 보면 왼편에 이런 공원이 나타난다. 그새 소나기라도 내렸던 건지 바닥에 고인 물에 하늘과 공원의 풍경이 반영되어 맑고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해 놓았다. 물이 고인 바닥은 마치 거대한 거울 같다. 마음이 맑아지고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아이들은 물장난을 친다. 아이들이 물을 좋아하는 것은 세계 공통인가 보다. 그런 모습에 흐뭇한 웃음을 보이는 행인들도 즐거움을 담아간다.
그것은 소나기가 아니라 분수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었는데 갑자기 일순간 분수가 솟아올랐던 것이다. 환상적인 선물 같은 서프라이즈였다.
그것은 또한 축제였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렸고 넘어지고 웃고 뒹굴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 순간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아마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나 또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분수 광장 옆 푸른 잔디 위로는 오후의 마지막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한잠 늘어지게 자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로 아빠와 한창 공놀이를 즐기고 있는 꼬마 숙녀가 눈에 들어온다. 조그마한 발로 힘껏 공을 차는 어린 딸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멋쟁이 아빠의 모습을 난 또 이렇게 렌즈 속에 담았다.
자전거에 이런저런 보따리를 가득 실은 이 남성은 아마도 구시가지에 즐비한 레스토랑들 중 하나로 향하는 중이 분명하다. 니스의 레스토랑은 보통 7시까지 브레이크 타임이니 저녁 장사를 위한 해산물 식재료를 공수해가는 것이 아닐까.
니스의 바다, 지중해! 물빛이 어찌나 파란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짙고 아름답다. 아무리 날씨가 따뜻해도 수영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제법 많은 사람들이 해변에서 자연스럽게 썬텐을 즐기고 있었고 나는 쭈뼛쭈뼛 그들 사이로 걸어갔다.
니스 해변의 파라솔 풍경. 파라솔이 있는 곳은 무조건 유료 지대다. 무료로 니스의 바다를 즐기고자 한다면 해변의 자갈과 친해져야 한다.
먼 바다에서는 삼각돛을 단 요트가 떠다니고 눈 앞에선 영롱한 푸른 바다가 넘실댄다. 수영을 배워두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며 눈으로만 보고 또 본다.
니스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로 향하는 길이다. 영국인의 산책로를 따라 니스 성 방향으로 걷다 보면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전망대에서 본 니스 해변. 날이 흐려 아쉽지만 그래도 근사했다. 가슴이 탁 트이고 세상 근심이 모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시원함에 연신 웃음이 난다.
전망대의 공원에서 니스 해변의 반대편 쪽으로 가면 이런 작은 옛 항구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오렌지색 지붕들이 푸른 바다의 빛깔과 잘 어우러진다.
니스의 아침이 밝았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카페를 찾아가는 길이다. 신나는 라틴 음악이 요란스레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창가에 장미꽃 한 송이가 놓여있다. 싱싱한 장미의 붉은색과 열정적인 음악의 리듬이 참 잘 어우러진다. 누군지 몰라도 삶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사람일 듯하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성당의 풍경이 맑고 아름답고 평화롭다. 지난밤 거리에 가득하던 사람들은 다들 늦잠을 자는지 니스의 아침은 조용하기만 하다.
이런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또 다른 여행자들을 구경한다.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생각해보니 어딜 가나 만날 수 있는 중국 사람들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해변에서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길이다. 횡단보도를 건너 아치를 지나면 레스토랑과 카페, 기념품샵이 가득한 구시가지가 나타난다.
니스에서 버스를 타면 생 폴 드 방스나 에즈 빌리지 등 한 두 시간 거리의 가까운 마을에 다녀올 수 있다. 난 비가 오는 바람에 에즈 빌리지는 포기하고 다른 날에 생 폴 드 방스에 다녀왔다. 생 폴 드 방스를 다녀온 짤막한 이야기는 니스 다음 편에 이어서 다룰 예정이다.
구시가지의 레스토랑이 가득한 살레야 광장. 매주 월요일에는 앤틱 플리마켓이 열린다.
구시가지 골목길 한 가운데에서 서 있는 노부부. 이쪽으로 갈지 저쪽으로 갈지 투닥투닥 의논을 하시더니 곧 발걸음을 재촉하여 사라지셨다. 모르긴 해도 아마 할머니의 의견대로 하지 않았을까?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니스는 프랑스 같기도 하고 이탈리아 같기도 한 묘한 매력을 지녔다.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다 보면 이탈리아를 연상시키는 젤라토 가게와 프랑스의 상징인 노천카페를 동시에 만나게 된다.
니스에서 최고의 산책길은 '프롬나드 데 장글레'다. 야자수와 지중해 사이를 걷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흥분된다.
니스라는 휴양지에서 보내는 하루는 여유롭고 또 여유롭다. 천천히 걷고 한참을 바라보아도 니스의 풍경은 한결같이 아름답다. 숙소는 정해져 있고, 내일도 역시 나는 여행자라는 '현실'이 너무나도 좋았던 순간. 그런 니스에서 노을을 기다리며, 노을을 맞이하며 그렇게 서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아 저물어가는 햇볕을 따사롭게 얼굴에 느끼며 웃고 있는 그녀가 보기 좋다. 난 혼자였지만 이런 좋은 풍경들을 볼 수 있어 그 나름대로 좋다. 실컷 충분히 느낄 수 있어 좋다.
'프롬나드 데 장글레', 영국인의 산책로란 말보다 그 편이 더 프랑스다워서 어울린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니스의 해변을 감상하기에 완벽한 프롬나드 데 장글레의 하얀 벤치는 이미 만석이다. 걷다 보니 또 니스 성 앞까지 와버렸다.
이런 길을 따라 해 질 녘의 조깅이라니 얼마나 시원할까. 나도 다음 여행에는 트레이닝복을 챙겨가야겠다 기약해보지만 아마 나의 느긋함과 게으름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해가 거의 다 떨어지고 기온도 내려가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프롬나드 데 장글레의 하얀 벤치는 이제야 내 차지가 되었다.
노을을 좋아하는 내가 니스에서 노을을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노을은 이상하게도 어느 곳에서 보아도 다 아름다운 것 같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다. 붉은 노을을 보고 있느라 어둠이 찾아온 것도 몰랐는데 어느새 깜깜해졌다. 노을이란 어둠이 오는 것에 너무 두려워말라고 주신 선물일까. 쓴 약을 먹어야 할 때 어머니가 챙겨주시는 달달한 알사탕처럼.
니스는 바다의 도시니 단연 해산물이 단골 메뉴다. 블로그를 검색해서 찾아갔던 어느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파스타를 주문하고 와인도 한잔 곁들였다. 인심도 좋지. 해산물이 한가득한 접시가 너무 커서 한참을 먹고도 남겨야 했다. 와인 한잔에 상기되어버린 얼굴을 하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니스에서 아침은 항상 카페 'Paul'에서 크로와상과 카푸치노로 시작했다. 값싸고 맛있고 부담 없는 테라스석에 앉아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이 작은 아침 식탁으로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1번 트램이 지나다니는 중앙대로 거리에 있었던 모노프릭스. 한국과 유사한 대형마트다. 모노프릭스를 발견한 뒤부터는 계속 이곳에서 이것저것 사다 먹었다. 타국의 마트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고 음식들도 먹을만했다. 하루는 밥이 너무나 그리워 초밥을 사 먹었다.
또 한 번은 돼지고기와 삶은 계란, 토마토와 그린 샐러드가 담긴 팩을 5.9유로를 주고 사 왔다. 샐러드에 돼지고기라... 좀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맛있었다. 발사믹 소스를 뿌려 맛나게 한 끼를 해결했다.
니스의 밤이다. 마세나 광장의 '니스의 대화' 조각상에는 핑크, 블루, 옐로우 등 다양한 컬러의 불이 들어오고 또 계속 변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소박한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과 운치 있는 트램은 얼마쯤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때로는 시간이 아니라 장소를 이동해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니스는 치열하지 않아서 좋다.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깨끗한 거울 같이 기분을 맑게 해주는 이 공원이 나는 참 맘에 들었다. 밤의 조명이 반사되어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니스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8시만 되어도 가게는 문을 닫고 모두들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대로변이 아니라 골목 안쪽이라면 아예 사람이 없기도 하다.
모노프릭스에서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밤길이 무서워지려는 찰나, 까만 하늘을 캔버스 삼아 장식해 놓은 파란 전구 장식의 불빛들 덕분에 돌아가는 길에 또 한번 미소를 짓는다.
그 꺄르륵거리는 즐거움은
마치 천국의 증거 같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천국이 있다면 니스 같은 모습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아마도 유난히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해변을 달리는 아이들,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 그리고 푸른 잔디 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그 꺄르륵거리는 즐거움은 마치 천국의 증거 같았다. 어쩌면 내가 그런 것들을 아니, 그런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니까.
이곳저곳 여행을 하다 보니 삶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새롭게 접하게 된다. 그런 순간이면 삶이 무슨 죄인가, 그리 살지 못하는 내가 잘못이지 싶어 진다. 니스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