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왜 공문을 두려워하니?
고용센터 김주무관 이야기
'공문'(公文)이 무서웠다.
처음부터 공문 끝자락 기안 김00주무관으로 이름이 올라가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뭐랄까.
내가 먹은 적이 없는 유명 맛집에 대한 리뷰를 내 이름으로 올리는 느낌이랄까.
(정말 딱 이 기분이다.)
그래서 한번 공문을 작성할 일이 있으면 2박 3일이 걸렸다.
옆에 주무관님은 "글쓰기 좋아한다면서 왜 공문 쓰는 것은 한나절이 걸리남?" 하시면서 의아해하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쌤, 글쓰기랑 달라요. 이건 내 기준에선 글쓰기가 아니에요."
"전 글을 쓸 때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느낌인데요. 공문을 작성할 땐 빛이 안 들어오는 봉제공장에 들어가서 천을 재단하는 기분이에요."라고 솔직한 기분을 털어놓으려 했으나 못했다.ㅎ
2년 전, 처음으로 공문을 작성한 후 팀장님 결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팀장님이 허겁지겁 오셔서 그러셨다.
"00씨 그러니까 00 사업장에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
나는 바로 " 이게이게 잘못됐고, 각각의 수정자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팀장님은 "음,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가셨다.
1시간 후 1.0 버전의 내 공문은 2.0 버전을 거쳐 3.0 버전까지 레벨 업 된 후 결재가 돼 있었다.
1.0 버전, 2.0 버전, 3.0 버전의 문서를 모두 프린트한 후 달라진 그림 찾기를 시도했다.
1.0 버전에서 2.0 버전 사이에는 쉽게 달라진 그림을 찾을 수 있었다. 문자표도 달라졌고 문자의 길이, 띄어쓰기도 달라져 있었다. 예를 들어 요청함->요청, 주민 등록 번호-> 주민등록번호 식으로.
그런데 2.0 버전에서 3.0 버전 문서 두 개는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눈을 비비고 봐도 달라진 그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옆 주무관님에게 두 개의 문서를 보여주면서"'어디가 달라졌는지 알 수 있겠어요?"라고 물어봤다.
20년 짬의 옆 주무관님은 눈을 한번 크게 뜨고 보시더니 "어 표의 크기가 미세하게 달라졌네. 글자 간 공간을 안정적 크기로 재설정한 거 같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아 ~~~~, 그게 달라진 거였구나."
역시 공문작성은 글쓰기가 아니다. 핵심은 쉽게 간략하게 전달해야 하며 눈의 피로감도 쌓이지 않게 편집해야 한다. 그나마 두 번째 공문을 작성할 땐 심기일전하여 2.0 버전으로 결재가 났다. 하지만 공문을 쓰는 데 3박 4일이 걸렸다.
그래서 2년 짬의 나는 공문 작성을 피하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꼼수를 부려보려고 했다. 20년 짬의 선배가 "니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봐"했다. 그래서 나도 해봤다. 하지만 마지막 '지원금'을 지급하려는 순간 도저히 결재요청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2년 짬인 내가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니 거'였다.
20년 짬 선배가 슬쩍 미소를 지으시면서 한 마디 보태셨다.
"거 봐라, 처음부터 기관에 공문 보내라고 했지? 공무원이 왜 공문을 두려워해.
이젠 제법 쓰더구먼 이제라도 공문을 보내"
자유로운 영혼에게 공문의 산은 높았다. 하지만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거늘.
공무원이 공문을 두려워해선 안 되지. 하다 보면 신나서 공문을 작성하는 날도 오겠지. 그런 날도 반드시 오겠지. 입으로 마음으로 되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