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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Apr 09. 2023

소처럼 일하는 ENFP는 처음이지?

김주무관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해봤던 모든 mbti 검사의 결과는 ENFP였다. 나도 인정한다. 종종 결과를 부정하는 주변인들도 보았지만 나는 아니다. 결과지에 나온 한줄한줄이 다 내가 맞았다. 나는 나도 친구도 가족도 인정한 진정한 ENFP이다.


왠지 ENFP는 자유롭게 둥둥 날아다니며 터질 것 같은 '한량'으로 해가 쨍쨍한 날 나무 그늘에 누워 하모니카를 부는 베짱이를 상상하기 쉬운데, 물론 그런 ENFP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식은 아니다.  


내 친구의 말처럼 '나는 소처럼 일하는 ENFP이다.'


분명 계획한 적은 없고 본능적인 감각에 맞춰 살아갈 뿐인데 매우 바쁘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계획하지 않았지만 장이 약한 ENFP는 유산균을 먹고 집안의 창문틀을 마른 수건으로 한 번씩 닦는다. 전기밥솥의 취사버튼을 누른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먹는다, 씻는다. 도시락을 싼다. 아이들을 깨운다. 출근한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출근 전 매일 비슷한 시간 편의점에 들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산다.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면서 무엇을 적을지 생각도 해보고 앞에 있는 도서관 뒤로 올라오는 해도 보고 때 이른 꽃들의 개화도 본다.


가끔은 이 장소를 나처럼 좋아하는 또 다른 동기 녀석의 연애 한풀이를 들어주기도 (상담은 아님)한다.


계획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따뜻한 커피, 설레는 가수의 목소리, 떠오르는 태양 또는 떠 있는 태양, 흩날리는 벚꽃 잎, "오늘은 이걸로 이너프(enough)" 사무실로 발길을 돌려본다.


9시부터 6시까지 오로지 일에 집중한 내 영혼은 퇴근 후 다시 집안일 모드로 전환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탁기 돌리기, 청소기 돌리기. 마른빨래 정리하기. 저녁 식사 준비하기 먹기 치우기, 그리고 씻기. 그다음엔 오늘 내 인생의 마지막 행사 잠자기. 그리고 다시 계획하지 않았지만 다음 날 6시에 일어난다.




매우 신파스럽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과거의 나도 내 육체에 '한량'스러운 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육체는 계획한 것처럼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했다.


노동은 돈이 됐고 돈은 노동이 됐다. 눈을 뜨고 자기 전까지 쉼 없이 쳇바퀴를 돌렸다. 그것은 마침내 자유로운 ENFP인 나의 습관이 됐다. 나는 어렸을 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의 절박한 궁지들에 몰렸었다. 그 벼랑들이 나를 '소'로 만들었다.


친구는 말한다. "언니 좀 쉬어, 언니 너무 소처럼 일하지 마. 언니 이제 쉬어도 되잖아."

                     "일하는 게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 언니도 일이 좋다는 말 그만하고 그냥 쉬어."

 

mbti는 삶을 대하는 사람의 자세이다.

나의 겉모습은 소처럼 하루종일 밭을 갈고 있다. 하지만 그 소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밭을 갈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지금 보이는 이 소로 말하자면 현재 머릿속에 무지개가 가득하다.

무지개 하나는 밭을 갈기 전 마셨던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혈액순환이 잘 돼서 기분이 좋다이고

무지개 하나는 밭을 갈 때 맡아지는 신선한 풀냄새에 기분이 좋다이고

무지개 하나는 방금 밭을 갈 때 파스텔톤 돌멩이를 발견해서 기분이 좋다이고

무지개 하나는 밭을 다 갈고 나서 집에 가서 깨끗이 씻고 따뜻한 방에서 잘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이고

그리고 무지개 하나는 내일 다시 이 밭에 와서 밭을 갈 수 있다면, 그땐 비가 오면 어떨까라고 상상도 해보고.


'소'처럼 일하는 ENFP 김주무관은 누군가에는 미련스러워 보일지라도 언제나 하루종일 밭을 갈 거 같다.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친구들아 '소'의 노동이 아니라 소의 무지개도 생각해 주렴. 소는 충분히 '무지개들'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으니 말이야.


p.s 이렇게 말해도 그들은 ENFP 소를 모른다. 오케이 흔하지 않은 소니깐. 소가 이해하는 걸로.^^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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