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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Mar 26. 2023

벚꽃, 슈크림라테, 그리고 성과급

고용센터 김주무관 이야기


뉴스를 보면 각종 고용노동부 지원금들이 한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지원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청년을 채용하면 지원금을 준다, 중년을 채용하면 지원금을 준다, 출산하면 지원금을 준다 등.


하지만 모든 지원금은 한 가지만 충족해선 지급이 안 된다. 그건 기본이고 그 이상으로 충족해야 할 조건들이 더 많다. 그리고 너무나도 기본이겠지만 모든 상황은 서류로 증빙돼야 한다.


결국 몇 개의 산을 넘지 못하고 지원금을 받지 못하면 사업주들은 담당자를 괴롭힌다. 관련 법령이나 지침들을 택배로 보내라기도 하고 본인이 납득할 때까지 설명을 하라고 한다.


몇십 분간 실랑이를 벌인다. 시작은 국가의 경제기조를 논하는 것이다, 이후 역대 대통령들을 다 소환해 노동정책을 비교했다가 마지막엔 담당자의 말꼬리를 잡는 걸로  낸다.


그 순간, 나는 아침 출근길에 봤던 분홍색 벚꽃들을 눈앞에 그려본다. 칙칙해졌던 기분이 분홍분홍 해진다.

이리도 빨리 피어버렸다.


지원금을 신청한 이 중에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땐 다 이유가 있다. 사업주의 배우자 또는 며느리, 아들, 딸 등 친인척 관계임에도 고용보험을 취득해 어떤 지원금을 신청하려는 경우이다.


이런 관계라고 항상 지원금 부지급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관계가 사업주와 근로자라면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 허위근로자인 경우가 많다.


사업주의 딸이라 하더라도 실제 일을 하고 있는 근로자라면 사업주의 목소리는 당당하다. 어떤 자료라도 다 보내줄 수 있다고 하며 요청한 자료는 앞뒤가 깔끔하게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거짓 상황을 만들어 주장하는 이들은 담당 주무관의 단순한 질문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거짓 상황을 만들고 소리 내어 말하면서 본인 스스로 믿도록 세뇌한다. 어느새 그들에게 거짓 상황은 진실이 됐고 그들은 고집스럽게 진실은 담당 주무관이 밝혀내라고 주장한다.


주장하는 사람이 입증을 해야 하지만, '공무원의 친절한 서비스 정신'이 당연화 된 시대에 발맞춰 거짓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들이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나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울고 떼쓰고 반말하고 화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거짓은 끝까지 거짓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도 나에게 세뇌한다.


이런 순간, 봄바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봄시즌 메뉴인 슈크림라테의 맛을 그려본다. 눈 깜짝할 사이 녹아버리는 슈크림의 부드러움을 떠올리다 보면 날카로움에 대해 조금은 무뎌질 수 있다. 그리고 연노랑의 슈크림을 보고 있다 보면 그들을 잊게 된다.



그런 날도 있다. 3월 어느 날, 봄의 온도가 따뜻하게 퍼지는 오후, 강 주변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해서 하늘거리고 연두색 이파리들이 가득한 나무들이 나란히 서서 나를 부를 때가 있다. 긴 머리 수양버들도 어서 사무실에서 나오라고 재촉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앞으로, 옆으로 쌓여있는 서류들을 지나치지 못한다. 내 시간은 여기에 묶여있다. 심도 있는 계획은 아니었지만 선택은 내가 했다. (기쁜 마음으로)


그럼에도 환하게 밝은 찬란한 오후를 보다 보면 깊은 곳에서 밀고 올라오는 억울함이 있다. 눈을 감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시계를 돌려 푸른 디와 꽃바람이 부는 공간의 문을 열어본다. 그리고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을 연다. 바로 3월 말에 나올 성과급 지급 계획서. ^^



ENFP인 나는 가끔 이 모든 상황들이 대본 없이 찍고 있는 몰래카메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의외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임기응변식 대사를 척척 한다.


물론 말문이 막힐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친인척 관계인가요?" 물었더니

"친인척은 아닌데 며느리예요."

몇 초 침묵이 흐르기도 하지만 이내 "죄송합니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지 말입니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죠?"라고 마음의 소리를 전하기도 한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지어 거짓을 진실처럼 주장하는 이들마저도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잠시 긍정의 침묵 시간을 준다. 그리고 대화는 물 흐르듯 이어진다.


p.s

글을 쓰고 고치고 하는 일주일 사이 남쪽의 벚꽃은 만개해 버렸다. 너무 빨리 피어버린 벚꽃들이 자꾸만 아쉽다. 곧 바람에 꽃잎이 떨어질 것을 아는 나로선, 급하게 피어버린 벚꽃이 야속하기까지 하다. 벚꽃 보면서 많은 것들을 날려 보냈는데, 조금만 천천히 가자 부탁해 벚꽃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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