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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Jan 20. 2024

6학년 졸업생의 꿈, 평범하게 살기

김주무관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얼마 전 나의 영혼치료자이자 심리주치의인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흐린 날이었다.

하지만 졸업식이 진행되는 강당에 들어서니 그곳은 초록이 가득한 봄이었다.


우리가 보기엔 어린이지만 청소년이라 주장하는 아이들의 얼굴엔 푸름이 가득했다. '젊음'이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안 되는 말랑거리는 볼살이 가득한 어린 영혼들의 재잘거림들이 나를 마냥 미소 짓게 만들었다.

나도 저 자리에 앉아 있을 때가 있었는데 머리에 나의 13살 졸업식이 스쳐 지나갔다.


눈을 감으니 12명의 졸업생이 전부였던 산촌의 작은 국민학교 졸업식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나는 그때도 글쓰기를 좋아해서 졸업생 대표로 '남아있는 후배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써서 낭독했었다. 안타깝게도 그 편지의 내용은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편지를 낭독한 후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누군가 조용히 울기 시작했던 것은 기억난다.


다시 눈을 떠 보니, 교장 선생님이 졸업생 한 명 한 명에게 졸업장을 수여하고 있었다. 강당 가운데 큰 화면에는 13살 졸업생들의 한 점 티도 없는 연두빛깔의 증명사진과  이름, 나의 꿈, 하고 싶은 말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꿈은 '건물주'였다. ㅎㅎㅎㅎ


교사, 의사 등 우리 시절의 13살 꿈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2024년 13살 아이들의 솔직함에 졸업식에 참여했던 40대 중반 비슷한 또래의 학부모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돈 많은 백수'가 꿈으로 나왔을 때 가장 크게 웃었었다.


그리고 어느 아이의 꿈에선 감탄이 나왔다. '평범하게 살기'가 꿈이었다.

웃을 수 없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특히 나는 삶의 진리를 일찍 알아버린 13살 아이가 한편으로 부러웠다.

누가 알려줬을까. 저 아이는 어디서 저 진리를 알아냈을까.


 


저 꿈은 지금의 내 꿈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야 '평범하게 살기'가 꿈이 됐는데, 이제야 말이다.


가정에서도 누구도 아프지 않고 세상에서 말하는 평균 수명을 채우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기를

세상에서 말하는 4인 가족 평균 수입을 얻고, 평균 지출을 하고, 평균 아파트 평수에 살고, 평균 차를 소유하며 평균 수치대로 흘러가고 싶다.


회사에서도 크게 눈에 띄지도 않고 그렇지만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존재감이 있는

아주 매우 일을 잘하지 않지만 옆에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일을 하는

평가도 매우 우수는 아니지만 중간 정도 우수하다고 등급을 받는

누구에게도 시기질투 대상이 되지 않지만

아주 조금은 부러움의 존재가 되고 싶은

그런 평균의 공무원이 되고 싶다.


써 보고 나니, 이것이 '평범하게 살기' 인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평범하게 살기'가 어떤 삶인지 모르는 거 같다.  

13살 졸업생은 알고 있을까. 45살이 돼도  '평범하게 살기'를 문장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나의 영혼치료자인 둘째 아들의 꿈은 뭘까.

나도 남편도 졸업식 강당 화면을 보고 처음 알았다.

평소에 꿈에 대해 고민을 종종 했던 것을 보았던 지라 궁금했었다.


나의 이름 : 정 00

나의 꿈 : 해설자

하고 싶은 말 : 졸업 축하해, 중학교에서 좋게 지내자.


채식주의자 둘째 아들은 축구를 좋아한다. 그런데 육식을 하지 않으니 몸이 또래에 비해 왜소하다.

아들이 4학년 즈음에 물었었다.

"엄마 축구 선수를 하려면 뱀을 먹어야 한다는데 어떡하지. 난 뱀은 정말 못 먹을 거 같은데"

아마 그때 축구 선수는 포기한 거 같다.

그 이후 아들은 프리미엄리그를 보며 개인 선수들의 이력이며 축구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13살 아들은 보고 있으면 가장 행복한 게 축구였고, 그 행복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 같다.

졸업식 이후 친구들의 링페이퍼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축구는 못하지만 지식은 많더라" 너의 친구 00 이가.  


행복의 전달자가 돼보겠다는 그 생각과

아직도 수백 개의 꿈들을 꿀 수 있는 찬란한 시간의 바다가 펼쳐있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도 부럽다. 부러운 13살, 부러운 나의 심리주치의 선생님.


<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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