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라서 존재감이 없었지
김주무관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첫째 언니는 처음 태어난 사람이라 모든 관심이 집중됐다. 누워만 있어도 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빠는 묻지도 않고 어디든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옛날 시골이었지만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이 그녀에겐 몇 장 있다. 우리는 단 한 장도 없는데 말이다.
둘째 언니는 그 집중을 깨트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두드러지게 했다.
끝없이 말대꾸를 해서 기억에 남게 했으며 춤도 추고 자주 까르르 웃었다. 늘 부지런했고 행동이 민첩했다. 그녀의 부단한 애씀은 어떨 땐 칭찬을 받기도 했고 어쩔 땐 혼이 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그녀는 조용한 집안의 시끄러움을 담당하는 자였기 때문에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애씀을 볼 때마다 '나는 절대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심지어 그녀가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는 상황도 있긴 했지만 이상하게 내 눈엔 그 '칭찬'이 순수해 보이진 않았다. '칭찬'이 아닌 노력에 대한 그저 '대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넷째, 즉 유일한 동생은 마지막으로 태어난 사람이라 형용할 수 없는 신선함과 말랑함과 귀여움으로 아무런 움직임 없이도 가족들을 끌어당겼다.
항상 아빠의 등에 매달려 있는 그녀를 보며 한없는 부러움과 질투가 마음에 가득했다. 나는 어렸지만 저건 절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을 되돌려 그녀와 나의 순서를 바꿀 수 없다는 것, 그건 나에게 '빠른 포기'라는 재능을 안겨주었다.
저 재능은 살면서 도움이 많이 됐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소중한 보물이 될 나의 몇 안 되는 '재능'이 될 것은 분명하다. (무한한 고마움을 넷째에게 보내본다. )
지금부터 나
셋째인 나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집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중간 위치로 관심을 받으려면 둘째 언니처럼 어떠한 활동을 했어야 했었는데 그것조차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둘째 언니는, 내가 보기에도 관심을 받기 위한 길을 잘못 들어선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다섯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조언을 할 짬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매일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던 언니를 보면서 나는 한참 고민을 했다.
그래서 선택한 나의 길.
그저 무존재감을 즐기자였다. 수업이 다 끝난 후 학교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책을 읽고 느즈막 집에 갔지만 아무도 나를 찾는 이는 없었다.
일찍 수업이 끝나 집에 가방을 던져두고 작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는 시냇물 주변에서 책을 읽고 있어도 나를 궁금해하는 이는 없었다. 책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긴 했다.
의외로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눈빛들은 학교에 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나에게 질문을 했다. 아마도 그것이 집보다 학교를 더 좋아하게 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호수의 신처럼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잉어들을 보면서 나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그토록 놀랍도록 존재감이 없었던 셋째였던 나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셋째인지 아니면 둘째 언니의 길을 가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확실한 건, 첫째와 넷째는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