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독 외할머니와 친했었다. 할머니는 나를 키우셨다. 당신의 막내딸이 장애가 있는 것도 모자라 남편과 일찍 사별했기에 어린 손녀 넷은 할머니의 몫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늘 한 편의 그림 같은 분이셨다. 4계절 내내 들에서 산에서 항상 일을 하고 계셨는데 그게 어린 내 눈에 그림 같았다. 하지만 언니 둘은 할머니의 진저리 나는 잔소리에 정이 안 갔다고 한다. 아마 그때 할머니가 조금 젊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언니들과 나이 터울이 좀 있었던 나와 동생을 키우셨을 즈음 할머니는 잔소리할 힘이 없으셨던 것 같다. 대신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밤마다 잠들기 전 우리에게 해 주셨다. 주인공 '아무개'로 시작한 이야기의 끝은 뭔가 모르게 해피엔딩도 아닌 것이 새드 엔딩도 아닌 열린 결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실 다 할머니 이야기에 msg를 넣고 결론은 우리의 선택에 맡기셨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시리즈였다. 길게는 14부작도 갔다. 한 편에 끝난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데'라고 걱정하셨지만 다행히 할머니도 이야기를 좋아했기에 초등학교 내내 이야기들은 이어졌다.
할머니는 겨울이 되면 깜깜한 새벽부터 마당에서 커다란 가마솥에 뜨거운 물을 끓이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우리를 아침에 따뜻한 물에 세수하게 하려고 그러셨다. 너무 당연해서 할머니의 수고로움을 그때는 몰랐다. 할머니의 하루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에게 밥을 먹이기 위한 나날들이었다. 사람인 우리부터 시작해서 강아지, 개들, 돼지, 소, 오리, 닭뿐만 아니라 식물들에게 거름이며 물이며 각종 밥 종류를 먹이다 보면 하루가 끝나신 듯했다. 심지어 지나가던 노숙인에게도 밥과 된장, 풋고추와 김치를 차려드렸다. 할머니가 되면 잠이 없어지는 줄 알았다. 할머니가 자는 모습을 초등, 중학교 다니는 동안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대학교를 들어가고 어느 날 할머니를 보러 갔을 때 할머니는 초저녁부터 잠이 드셨었다. 그때 알았다. 할머니도 잠을 자고 싶어 하셨구나. 할머니는 여름밤이던 겨울밤이던 밤이 되면 심심해하던 우리에게 화투도 가르쳐 주셨었다. 나는 할머니랑 민화투를 치는 게 정말 재미있어서 낮에 학교에서 밤을 기다렸다. 그때는 밤이 빨리 오지 않았다. 낮이 길었다. 그런데 책 읽는 거 좋아하고 놀이를 잘 못했던 나는 낮이 그리 좋지 않았다. 친구들은 고무줄놀이도 잘 못하고 땅따먹기도 잘 못하고 달리기도 잘 못해서 술래잡기도 못하고 숨바꼭질도 못했던 나를 잘 끼워주지 않았다. 그나마 착한 친구들은 나를 깍두기로 끼워주긴 했었다.
승패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 상대방 팀 구성원들이 강력한 우승후보들로 모였을 경우 약한 팀에 덤으로 주는 멤버로 들어가는 거라 실상 나도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랑 화투도 치고 이야기도 듣고 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할머니의 화법이 나는 늘 신기했다. 할머니는 모든 말이 속담에서 시작해서 속담으로 끝이 났다. 속담을 잘 몰라도 쉬운 단어들이 중간중간 들어가면서 어린 나도 이해는 됐다. 할머니랑 대화하는 게 재미있었다.
할머니는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까맣고 거친 왼쪽 손 네 번째 손가락에 아주 굵은 은반지를 끼고 계셨다. 할머니에겐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우리 엄마 말고 읍내에서 슈퍼를 하시는 좀 사시는 둘째 딸이 있었다. 그 이모는 가끔 우리 집에 과일을 한 가득 내려놓고 급하게 사라지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모는 시집살이가 심해서 차로 10분 거리인 친정을 쉽게 오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튼 그 이모가 사 주셨다고 했다. 나는 그 반지가 세상 어떤 반지보다 예뻐 보였다. 그래서 항상 할머니에게 '이 반지 나중에 나 주면 안 되냐'라고 졸라댔고 할머니는 '꼭 우리 셋째 손녀딸 줄게' 하셨었다.
그러나 은반지는 결국 할머니와 함께 하늘나라에 갔다. 아마도 은반지가 할머니를 떠나기 싫었던가 보다.
고등학교 때 우리집에서 고속버스로 한 시간 걸리는 학교에서 집 가는 버스비가 아까워서 자주 집에 가지 못했다. 종종 가면 일요일 오후 다시 타지로 떠나는 내가 불쌍하다며 함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 주셨다. 그리고 저만치 버스가 오면 할머니는 겉 바지 속 고쟁이 바지 깊은 주머니에서 천 원을 꺼내 주셨다.
'맛있는 거 사 먹어'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나는 그 '천 원'을 쓰지 못했었다.
할머니는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줬는데 왠지 할머니와 맛있는 음식하고 교환하는 것 같아서 그 '천 원'을 누구에게 줄 수가 없었다.
'천 원'짜리 종이가 할머니 같아서 쓰지를 못하고 모아두었다. 아마 내가 그 '천 원'을 쓴 건 정말 집에 가고 싶었을 때 어쩔 수 없이 교통비로 썼던 것 같다.
이렇게 써도 다시 할머니를 볼 수 있으니 '이렇게 쓰는 건' 마음이 괜찮았었다.
돈 벌고 결혼하고 출산, 육아, 다시 돈 벌고 하면서 나는 한 번도 할머니를 잊은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힘들 때마다 내 꿈에 나와서 나를 위로하고 가셨다. 그래서 브런치 작가명을 생각할 때 난 주저 없이 '은반지'를 생각했다.
이렇게 탄생한 '은반지'를 잘 쓸고 닦고 하다 보면 가난했지만 할머니와의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것처럼
낮이던 밤이던 그 무엇이던 하루의 어떤 것들을 기분 좋게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4차원의 영혼을 가진 나답게 화이자 2차 백신을 맞고 나니 불현듯 들었다.
동생이 결혼선물로 뭘 원하냐고 했을 때 난 금반지라고 했다. 왜냐면 은반지는 할머니가 줬으니깐. 내 마음에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