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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Jul 10. 2022

엄마의 노래-동백아가씨

김주무관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헤~~일수 없이 수많은 밤을~~~~


엄마의 노래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내 유년시절의 배경음악이기도 하다. 엄마는 입에서 저 노래를 놓은 적이 없었다. 특히 <'헤~~~~~'일수 없이> 부분은 목소리의 꺾임이 중요한 듯했다. 엄마는 항상 첫 소절을 제대로 해내야 그다음 소절을 부르셨다. 그래서 나는 저 부분만 또렷이 기억난다. 그다음 소절을 들은 기억은 희미하다. 궁금했다. 저 다음 가사는 뭘까?.


'수많은 밤을' 왜 헤아렸는가? 7살, 8살 나이가 들어갈수록 의문은 커져갔지만, 결국 나는 '나의 수많은 밤'에 집중하면서 궁금증은 잊혀갔다.

 



라디오에서 임창정의 '나는 트로트가 싫어요'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사를 듣고 있노라니

'사랑은 얄~~ 미운 나비인가 봐' 익숙한 가사와 음이 툭하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자 나의 뇌 회로가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지직지이직 번쩍번쩍했다. 잠시 후  <'헤~~~~~'일수 없이>  내 나이 또래의 엄마의 목소리가 오래된 엘피플레이어를 타고 들려왔다.


노래의 첫 소절이 생각은 났는데 노래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내가 끌어모을 수 있는 초능력을 다 끌어 집중한 결과 '동백아가씨'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찾아보니 이미자 노래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도 궁금했던 가사를 확인했다.


헤일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 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 할 그 사연을 가슴에 묻고/ 오늘도 기다리네 동백아가씨

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가사를 적고 나니 내가 왜 첫 소절 외에는 기억을 못 하는지 알았다. 엄마는 저 노래를 끝까지 부르시긴 했는데 (첫 소절에 힘을 여러 번 준 후) 가사를 이해 못 한 나는 듣지 못했던 것이다. 7살이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를 어찌 이해하랴.ㅎㅎ 심지어 가사는 3인칭에서 1인칭으로 급변조를 두니 엥? 하면서 나머지 가사는 우주로 보내버렸을 것이다.




엄마는 글자를 읽지도 못했고 쓰지도 못했다. 할머니에게 전해 듣기론 엄마가 8살 때 언니 따라 학교를 갔는데 엄마의 장애를 심하게 놀리는 동급생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 학교를 안 갔다고 한다.


이후 엄마는 구멍가게를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한글과 숫자 정도만 익혔다. 게다가 박학다식한 할머니와 함께 살기 때문에 크게 불편함이 없이 일상생활을 하셨다.  


하지만 엄마에게도 말 못 할 불편함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 구매였다. ' 메들리 테이프'는 특성상 여러 노래들이 랜덤으로 들어가 있다.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가 많이 들어 있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선 다양한 메들리 테이프를 비교 분석해야 한다. 글자를 모르는 엄마에겐 최대의 난코스였다.  할머니에게 말하면 '쓸데없이 돈 쓴다'라고 혼날게 뻔하고 동네에 사는 큰 이모나 큰 이모부는 나이차가 꽤 있기 때문에 부탁하기 편치 않았을 것이다.


20대의 젊은 엄마는 큰딸에게도 둘째 딸에게도 부끄러웠을 것이다. 30대 중반의 엄마는 이제 딸에게 말할 용기가 생겼지만 첫째와 둘째는 타지에서 학교를 다닌다. 엄마의 선택은 셋째 딸이었다. 넷째 딸이 한글 배우길 기다리기엔 엄마의 청춘의 시간은 빨리 흘렀다.


그렇게 엄마는 셋째 딸인 내가 학교에 가서 한글을 배우길 기다리셨다.  9살 때부터 나는 엄마와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를 사기 위해 읍내를 갔다. 동네 아줌마가 옆 도시에 좋은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가 나왔다고 하면 테이프를 사기 위해 옆 도시에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기도 했다.


엄마에겐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를 선택할 때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와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 봐'는 반드시 들어가 있을 것.

그다음으론 필수 노래들이 더 있었는데 이건 내가 기억이 안 난다. (엄마 미안)

그리고 이미자와 주현미의 노래가 많이 들어가 있을 것.


나는 테이프 가게에 도착하면 엄마의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해 빠르게 트로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입력된 엄마의 기준을 암기하며  4~5개의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를 동시에 눈으로 훑었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면 최종 2개에서 3개로 좁혀진다. (이때의 훈련이 나의 멀티 독서를 가능하게 한 건 아닌지 ㅎ)


마지막엔 엄마에게 파이널 라운드의 테이프에 들어있는 노래 제목과 가수를 주욱 읽어드렸다. 다 듣고 나서 엄마는 한 개를 선택했다. 아무리 맘에 들어도 두 개를 사지는 않으셨다. 할머니도 어느 순간 나와 엄마가 읍내를 가면 테이프를 사러 가는 것을 알았겠지만 모른 채 해주셨다. 내가 중학교 들어간 이후로 셋째 딸과 함께한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 쇼핑은 끝이 났다.


중학교에 들어간 셋째 딸은 공부에 집중한다고 엄마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넷째 딸과 함께 사러 가면 되는데,  그러지 않으셨다. 그 노래가 마구마구 좋았던 엄마의 청춘도 그즈음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껏 놀 수 있었던 초등학교 시간과 누군가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던 엄마와의 시간이 딱 들어맞았던 그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

엄마는 기억하고 있을까. 그런 시간이 있었음에 감사해본다. 엄마 건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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