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휴가의 끝, 사무실 문을 여니 우리를 반기는 것은 각종 지원금 신청 서류들이었다. 국민들도, 사업장의 담당자들도 긴 휴가를 끝내고 바로 접수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특히 예산 사업은 예산이 소진되면 지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서둘러 버튼들을 누른 듯하다. 결과적으로 컴퓨터 안 각각의 시스템 안에서 나의 할 일의 개수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모두들 이번 주 '미친 듯' 서류를 출력했다. a4용지 박스를 두 개씩 옆에 두고 프린트에 '용지 없음'이 뜨고 '삐삐삐'소리를 내면 하얀 종이밥을 프린트에게 빨리 먹였다.
나도 기계가 되어 서류를 출력하고 서류를 보고 각종 사이트를 통해서 정보를 확인하고 더하기 빼기를 하다가 눈동자에서 '눈물 없음'이 뜨고 '뻑뻑'소리가 나면 눈에 인공눈물 한통을 가득 넣었다. 넘치는 인공눈물은 가볍게 닦아주면서 다시 컴퓨터 화면을 봤다.
가끔 화장실을 가다가 복도에서 혹시라도 나와 같은 종족(k주무관+p주무관)을 만나게 되면 말없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눈빛은, 지금은 기계가 되어 인공눈물과 묽게 탄 블랙커피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신세지만, 금요일엔 반드시 '고기'와 '소맥'을 몸에 인간답게 넣어주자는 결의였다.
바야흐로 심사업무에 지친 우리에게 '금요일'이라는 신세계는 오고야 말았다.
1차는 돼지 생갈비 가게였다.
여기가 굉장히 시끄러운 곳이다. 그래서 택했다. 우리 모두 인간답게 '큰 소리로 말해보고 싶어서'이다. 우리는 '큰 소리'로 말할 수 없는 공무원이니깐 말이다. 물론 고기 맛이 예술인 건 기본이었다. 우리의 계획을 다른 팀 동기에게 말해줬더니 그 동기들도 급하게 와 저쪽 테이블에서 고기를 먹고 있었다.
4명이지만 5인분의 고기를 주문했다. 급하게 소주 2명, 맥주 3병을 한꺼번에 주문하려는 나의 팔을 p주무관님이 잡았다. "샘, 미리 시켜두면 시원함이 없어져요." 나는 "아차, 내가 그것을 왜 까먹어버렸지? 미안"
우리는 일을 처리해도 나의 할 일 페이지의 변함이 없다는 얘기들을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래야 들리기 때문이다. ㅎㅎㅎ 이상하게 모두 큰 소리로 말하지만 각 테이블의 이야기가 들리진 않는다.
한참 큰 소리로 '자기 이야기 말하기' 삼매경에 빠졌을 때 선홍빛의 돼지 생갈비 5인분이 스윽하고 들어왔다.
우리는 한참 박수를 치고 직원분이 고기를 옆에 구워주시는 것을 보면서 신기한 '불쇼'를 보듯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ㅎ 중요한 건 우리는 아직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직원분이 통통한 갈색의 돼지갈비 한 점에 연둣빛 고추냉이를 올려 "드셔 보세요"라며 고기 한 점씩을 우리의 개인 접수에 올려주셨다. 자 이제 소맥을 제조할 시간이다. 우리는 각각의 소맥 제조법을 가지고 있다. 저번엔 내가 제조를 했었는데 평이 좋았다. 오늘은 p주무관님이 제조하기로 하셨다.
소맥과 돼지 생갈비 한 점을 시끄러운 사람들의 말소리를 뒤로 한채 꿀꺽 마시고 씹으면서 내가 심사' 기계'가 아니고 '인간'이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2차는 하이볼을 파는 이자캬야였다.
예전에도 몇 번 오고 싶어 했지만 사람들이 가득 차서 바로 앞집의 이자카야를 갔었던지라, '이번에는 자리가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배는 고기가 가득했기에 안주엔 관심이 없었다. 관심은 하이볼이었다.
그런데 k 주무관님의 첫마디, "샘, 병원 맛이 나요" 설마 나도 한 모금 마셔봤다.
"음, 샘이 말한 병원 맛 그게 뭔지 알 거 같아요." 하이볼은 그렇게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저기서 p 주무관이 "샘, 바지락 우동 국물이 엄청 맛있어요." 우린 서둘러 숟가락으로 조금 떠 한 입을 후루룩 먹었다. 우리 모두 다시 감탄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와, 이게 살렸다. 우리의 2차를"
3차는 모양과 맛이 다른 여러 종류의 어묵과 청하를 파는 가게였다.
약간의 취기가 있었지만 우리는 취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모순적 표현이지만 정말 이랬다) 기게를 잘 다루는 b주무관님이 스마트폰의 지도를 보고 3차 가게로 이끌었다.
잠시 옆 골목으로 빠졌으나 이내 오류는 빠르게 수정됐다. "샘들, 이 골목 아니다. 어어 저기 저 골목으로 가면 돼요." 모두 잘 들었고 잘 걸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참석 인원의 변동이 있었다. 1차는 우리 팀 나를 포함한 4명, 2차는 같은 돼지 생갈비를 먹고 있던 다른 팀 우리 동기 c주무관과 p 주무관이 결합을 했고, 3차에선 옆 도시에서 버스로 출퇴근하는 k주무관님이 버스 막차를 타야 해서 빠지셨다. 추가하고 제외되는 인원 파악이 중요했다. 왜냐하면 내가 모두 카드결제를 하고 이후 정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3차에서 우리를 기쁘게 한 건, 술잔이었다. 정말 귀염 뽀짝이랄까. 소주잔도 아닌 맥주잔도 아닌 그 중간 크기의 와인잔 모양과 비슷했던 술잔은 또다시 우리의 감탄의 텐션을 높였다. 술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얀 달이 푸른 하늘 중간 정도 있을 때, 우리는 헤어졌다. 술과 안주로 인해 조금은 무거워진 우리는 집으로 데려다 줄 버스를 찾기 위해 다시금 스마트폰에 집중했다. "우린 취하지 않았음"을 한번 더 강조하며 아주 크게 손을 흔들고 큰 소리로 "잘 가요" 했다.
나는 이 도시의 외곽에 살아 막차 버스 시간이 끊겼다. 택시를 타려는데 한 동기가 집이 여기서 좀 가까워 걸어가겠다고 했다. 난 걷는 것을 좋아한다. 솔깃했다. 우리 집과 방향이 같았기에 같이 걷자고 했다.
4차는 뭐랄까.
그 가게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나오는 화려한 개츠비의 궁전 같았다.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여기서부터는 난 조금 취한 게 맞다)
동기와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2차선 도로가 어느 가게에서 노란 조명이 눈이 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끌려가듯 가게 앞으로 갔고 가게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동기와 나는 당연하듯 "우리가 배는 안 고프니까, 딱 1병을 나눠서 먹는 거야"라고 했다.
그리고 '배가 안 고프니까' 메뉴판에서 제일 간단한 메뉴를 찾았다. 땅콩이나 마른안주 같은 조용하고 마른 메뉴를 찾았으나 왠지 없었다. 아마도 궁전이라 그런가? 순간 생각했다. 고민 끝에 우린 동시에 "오징어 튀김"을 주문했다. 메뉴판에서 그나마 가장 군더더기가 없는 단정한 메뉴였다.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주제는 하나였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였다. 그게 민원인이든, 직원이든. 남자든 (ㅎㅎㅎ 동기는 아직 미혼이라서)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머리는 하나도 안 아픈데 종아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게다가 발 뒤꿈치는 까져서 빨갛게 부어올랐고 약간의 피도 나 있었다. 그러니까 4차까지 한 어제, 난 3센티 굽이 있는 새 구두를 신고 그리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4차 가게에 대한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인터넷에 정보를 찾아봤다.
검색해보니 작은 선술집이었다. 궁전이 아니었다. 맛집은 맞았다." 00동의 옛 느낌의 찐 맛집" , "레트로 감성의 옛 맛집" 등등 수많은 리뷰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옛날 사람인 것도 맞았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레트로'가 나한테 '궁전'이었으니 말이다. ㅎ
아주 오랜만에 4차를 한 나, 얼마만이지? 15년?
늦은 나이에 회사를 다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신기해서 적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