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데 쿠바,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서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혁명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던 2016년 겨울, 다섯 번째 전국 주말 집회가 있었던 11월의 26일, 숨가쁘게 쏟아져 나오던 뉴스들 사이로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짧은 부고기사가 끼어들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현지 시간 25일 밤,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다.
1959년 친미 독재 바티스타 정권을 쿠바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총리의 자리에 오른 후, 50년 가까이 쿠바의 최고 권좌에 머무는 동안 11명의 미국 대통령을 겪으면서 638건의 암살 시도를 이겨내고 결국, 자연사에 성공한 것이다.
또 한 명의 혁명가가 유명을 달리한 것에 대해 추도할 것인지, 아니면 얼마 남지 않은 장기 독재자가 마침내 또 하나 지구상에서 사라졌음을 환영할 것인지, 당시에 나에게는 딱히 대단한 소감이랄만 것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아, 결국 그도 죽었구나!’ 하고 사실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전부. 이 땅의 그 누구라도 머나먼 카리브해의 섬나라에서 벌어진 일에 신경 쓸 틈이나 있었을까. 당장 나의 대문 바로 바깥의 세상이 어지러이 뒤집어지고 있는 중이었고, 약 보름 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전 지구가 앞날을 걱정하며 크게 술렁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지나, 나는 지금 피델 카스트로가 묻힌 산티아고 데 쿠바의 산타 이피헤니아(Santa Ifigenia) 묘지에 서 있다. 아바나 한가운데 자리한 크리스토발 꼴론(Cristóbal Colón) 묘지에 이어,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이 국립묘지는 카스트로가 혁명의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던 호세 마르티를 비롯해 수많은 정치인들의 묘소가 모여있는 곳이다.
이곳으로 오면서, 나는 여차하면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영접하는 것처럼 북새통인 사람들 틈에서 시달릴 것을 각오해야 했다. 내가 이곳을 찾은 날은 카스트로 사망 1주기에서 바로 닷새 후였으므로, 며칠째 이어지는 성대한 추모식에 참배객들이 넘쳐나지는 않을까 하고 조금 마음을 준비를 해두는 것이 마땅했으니까.
그러한 염려를 짊어지고 살갗이 타들어 가는 햇빛 속을 달려 묘지로 가면서, 그래도 카스트로의 유언이 지켜졌으리라는 기대도 나에게는 분명히 있었다. 1주기 당일, 우리가 머물렀던 쿠바의 수도 아바나 그 어디에서도 기념행사나 추모식은 고사하고 벽보나 플래카드 한 장, 길에 놓인 꽃 한 송이, 촛불 하나 구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작 어리둥절했던 것은, 묘지가 희망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한산하다는 점이었다. 마침 교대식을 시작하고 있던 경비대를 제외하면 우리와 같은 시각에 묘지를 찾아온 외부 방문객들은 채 쉰 명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도 대부분 선글라스에 카메라를 목에 걸친, 우리와 같은 외국인들이다. 1주기 당일이라면 좀 달랐을까. 이쯤 되면 이제는, 우리가 아예 묘지를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할 정도이다.
묘지 초입에 우뚝 솟은 기념탑 같은 건물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저기가 마땅히 카스트로의 묘지가 아니겠나 싶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하던 길에, 우리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길가에 놓인 동그스름하고 큰 바위에, 말끔한 푸른빛의 동판이 정사각으로 붙어있고 거기에 ‘FIDEL’이라는 다섯 개의 활자가 양각으로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카스트로의 유언이 배신당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말의 주인이 사라진 후, 이제 그 힘을 몽땅 잃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그 약속의 말들이 부정당하지 않고 선량한 자들의 손으로 고스란히 지켜진 것이다. 고작 이름 다섯 글자가 새겨진 묘비명 뒤에, 저 육중한 바위 속 좁은 공간에 장식도 없는 나무 상자가 놓였고, 그 속에 191cm의 거구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들어가 있다.
다음 왕관을 머리에 얹기 위해 독재자의 주검을 독차지한 배신자는 아무도 없었다. 레닌, 호찌민, 마오쩌둥, 김일성의 빼앗긴 시신처럼 방부처리되어 관뚜껑도 없이 누워 있지 않았고, 터키의 아타튀르크나 스페인의 프랑코처럼 신전 같은 묘역도 세워지지 않았다.
동상이나 기념물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름을 딴 거리, 광장, 건물도 만들지 말라는 카스트로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다음 날 곧장 화장되었고, 그가 1959년 행군했던 혁명의 길을 고스란히 역행해 아바나에서 산티아고 데 쿠바로, 900km의 마지막 여정을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미국 자본주의의 하수구가 된 조국을 구하기 위해, 1953년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을 당시 숨진 전우들의 곁으로 마침내 침묵의 귀대 신고를 한 것이다.
유언을 말하는 자들은 두려움이 남아있는 사람들이다. 피델이 겁냈던 것은 무엇일까. 그가 사랑한 조국 쿠바가 자기 동상의 무게로 짓눌려 카스트로 이후의 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우려했거나, 아니면 바다 건너 다른 독재자들이 썩지 않는 미라로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지켜보며 영면의 안식을 박탈당할까 두려웠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혁명 동지였던 체 게바라의 얼굴이, 하루 12시간 지하공장에 갇혀 재봉질을 해야 하는 어느 동남아 어린이의 손으로 티셔츠에 프린트되어 전세계 청년들에게 그럴싸한 패션 아이템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제 혁명의 정신이 자본의 또 다른 좋은 상품이 되어버린 것에 공포를 느꼈을 수도 있겠다.
혁명은 위대한 사상가들에서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군인들에게로, 그리고 약물이 듬뿍 묻은 채 신비주의적인 모습으로 비트 세대나 히피들, 존 레넌에게로 넘어갔다가, 이제 대중문화 상품을 찍어내는 상업 예술가들과 신제품을 광고하는 명석한 마케터들의 전유물이 되지 않았나. 그가 이제 도저히 손을 댈 수 없고, 더 이상 특유의 몇 시간짜리 연설로 혼을 빼놓을 수 없는 그 오염된 정신들에 ‘레볼루션’이라는 제품이 여기저기 팔려 다니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을 것이니, 자신이 부정당하는 시대에, 자신이 실패한 미래에, 결코 시신을 내맡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죽음에 오열하며 슬퍼하는 이들도 있었고,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들처럼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 세계 많은 국가들은 하나같이 쿠바 국민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며 애도의 성명을 내놓았다. 당시 무능한 대통령과 정부가 꼬리를 감추느라 정신이 없었던 대한민국 정부에서 아무런 말도 전하지 못했음을 쿠바도 이해해주리라. 우리 또한 촛불을 들어 혁명을 치르고 있었으니까.
내가 처음 카스트로의 것이라 짐작했던 거대한 묘역은 호세 마르티의 자리였다. 360도 막힌 곳 없는 2층 참배 공간과 촘촘히 뚫린 천창 덕분에 서늘한 그늘 속에서도 어둡지 않고 탁 트인 공간, 거기 높은 자리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호세 마르티의 석상이 쿠바의 깃발을 얹은 오각형 모양의 자신의 목관을 내려다보고 있는 곳이다.
카스트로의 묘역보다 이 곳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드는 까닭은, 기념사진을 남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나와 아내가 그러했듯 그나마 이 곳이 그늘에 숨어 숨을 돌릴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직 이 묘지공원에 용건이 남아있으므로 이미 뜨끈해진 생수로 잠시 목을 축이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내가 이 곳을 찾아온 진짜 이유,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사연을 굳이 풀어놓자면, 쿠바에 대한 궁금증을 나에게 처음 심어준 것은 1999년 개봉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이었다.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면서 몇 년을 들리는 대로 흥얼흥얼 따라 불렀던 <Chan Chan>. 결국에는 그 멜로디 하나가 나에게 이 먼 나라의 역사를 가르치고 결국 여기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콤빠이에게 가는 길이 만만치가 않다. 우리 부부까지 이곳에 눕히려는 것인지 아니면 당장 여기서 쫓아내려는 것인지, 사방에 끝없이 늘어선 하얀색의 비석들과 바닥에 잔뜩 깔린 자잘한 자갈돌들까지 뜨거운 복사열을 맹렬히 토해내며 머리를 어지럽힌다.
휴대전화로 사진 찍어 온 묘지 입구의 안내도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지만, 결국 길을 잃고 만다. 반듯한 바둑판식 배열의 길이지만, 13.3 헥타르에 이르는 곳인 데다 주변에 이정표가 될 만한 표석이 하나도 없으니 타고난 길눈이라도 미아가 될 수밖에 없다.
죽은 자들의 사막에 조난 당해 이리저리 길을 찾던 중 다행히 구원의 인기척이 멀리서 들려온다. 누군가를 또 파묻고 오는 길인지, 일군의 묘지 인부들이 저 멀리서 흙 묻은 삽자루 따위를 어깨에 걸치고 등장한 것이다.
“¡Disculpe! 저기요! ¡Un momento!”
간절하게 양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이방인의 등장에 인부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멈추어 선다.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을 찬찬히 더듬어 뱉어보는데, “¿Dónde(어디에)...?”까지 나오자마자 인부 한 명이 “¿Compay?”하고 곧장 받아친다. 묘지 거의 뒷부분인 이 깊숙한 곳까지 찾아들어온 외국인이라면 목적지가 그곳밖에 없을 것이라 성공적인 추리를 하신 모양이다.
돌고 돌아 도착한 꼼빠이 세군도의 묘비는 그를 아는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꼼빠이의 시그니처인 페도라가 얹힌 어쿠스틱 기타 하나, 그리고 그 주변에 촘촘히 피어난 생명의 꽃들. 그 위로 본명인 Máximo Francisco Repilado Muñoz 대신 그의 예명 Compay Segundo가 양각된 얼룩덜룩한 구리 묘비가 반듯하게 박혀있다.
물어물어 겨우 찾아온 곳이건만, 내가 할 일이란 건 딱히 없다. 실력 좋은 아티스트가 아닌지라 기타를 꺼내어 들고 그의 노래를 한 곡조 불러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묘비 주변에 탁주를 뿌리고 절을 두 번 올릴 것도 아니다. 내가 참 좋아했던 음악의 주인을 찾아와, 그와 같이 나도 아무 말 없이 한 동안 가만히 앞에 마주하고 서 있기만 하는, 그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꽃을 한 송이 사들고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더듬더듬 추도비에 적힌 글도 읽어본다.
“나의 스승 Máximo Francisco Repilado Muñoz, 당신은 언제나 제 안에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생명의 꽃을 피워나가겠습니다.”
잠시 후 아내와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묘지 입구로 가는 길을 찾았다. 이제 정오를 향해서 가는 시간, 그림자는 더 짧아지고 태양이 더욱 뜨거워진다.
바위로 붙박인 피델과 꽃으로 피어난 꼼빠이를 뒤로 하고 그 폭염 속을 걸어 나오면서 나는, 죽은 자들이 시샘하지 않도록 나지막이, <아따이디(Ataidi)-생명의 꽃>을 흥얼흥얼 불러보았다.
구국의 영웅이 아니라도, 세상이 사랑한 음악가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뙤약볕 아래 시달리는 고단한 육체에 머물더라도, 저들처럼 죽지 않고 아직 온전히 살아있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 일인가.
<Ataidi : 생명의 꽃> - 꼼빠이 세군도
생명의 꽃,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머지않아 그 꽃들이 화려히 피어
당신의 곁으로 오리라.
그대 영감의 뿌리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따뜻한 기운을 품고 이제 여기 왔으니
그 꽃들을 차마 거절하지는 마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