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헨떼 호따(Agente J)의 첩보 보고서
아바나에서의 또 다른 아침, 혁명 광장까지 걸어서 방문하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물론 우리의 GPS는 출근길이 아니라 여행길 위를 걷고 있으므로, 목적지까지 가는데 드는 시간은 위대하신 구글께서 빅데이터를 연산하시어 점찍어주신 소요시간에 결코 부합하지 않는다. 가는 길에 이렇게나 넘쳐나는 볼거리를 어느 하나 쉽게 지나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을 연 가게, 아니면 문을 닫은 가게, 길가에 대충 나무상자를 쌓아 만든 노점, 거기서 저울에 올려지고 있는 처음 보는 근채류 한 알까지, 이 길에 놓인 모든 것들이 여행자에게 인력을 가하며, 목적지를 향한 직진을 방해한다.
특히나 바쁜 걸음을 더디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이제 막 왕초보 딱지를 뗀 나의 스페인어 실력이다. 눈앞에 나타나는 간판, 벽보 따위를 소리를 내어가며 옹알옹알 읽어대느라 자꾸만 발걸음을 멈춰야 하니 말이다. 특히나 쿠바의 거리에는 광고판이 없으니, 눈앞에 만만하게 읽어낼 만한 텍스트들을 발견하는 이 달콤한 즐거움을, 외국어 초급반 학생이라면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이러다 해 떨어지겠다는 아내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어느 상점 쇼윈도에 붙은 안내문 앞에 코를 붙이고 멈추어 선다. 아바나의 다른 많은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딱히 간판이 붙지 않은 이 작은 가게에, 특히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연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Participa. ‘참여하세요’라고 굵은 머리말을 얹은 A4 크기의 안내문이다.
“Elección de delegados a las asambleas municipales⋯⋯?
여기 투표소인 것 같은데?”
이럴 수가, 오늘이 아바나의 시의원 선거일이라니.
색깔을 맞춘 점퍼와 모자를 착용한 광란의 패거리들이 사거리에서 춤판을 벌이며 날뛰고 있지도 않은데. 대중가요에 후보의 이름과 기호를 가미해 가사의 경박함이 더욱 배가되도록 공들여 손 본 노래를 확성기로 울려대는 트럭도 보이지 않고, 거기에 올라타 공약은 모르겠고 그저 자신을 믿어달라는 주술만 걸어대는 얼뜨기도 단 한 명 보이지 않는데.
특히나 이렇게 기초의원 정도의 레벨까지 내려가면 그 후보자라는 치들의 면면이 더욱 소란스러워지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대개 지역 유지의 자제로 자라나 고향을 떠나지 못한 자이거나, 큰 주차장이 딸린 고깃집 사장으로 자수성가한 약력을 가지고, 선거를 앞두고 뒷산 약수터에 정자나 운동기구를 세우고, 조금 더 자금과 기획력을 갖춘 경우라면 대필한 자서전을 때맞춰 자비 출판하며, 지역 행사 단체 사진에서 지방자치단체장과의 거리를 서서히 좁혀나가면서 풀뿌리 지역사회에 얼굴을 등장시킨 후에, LED 불빛이 번뜩이는 유세용 트럭의 등에 마침내 올라타기는 했으나 딱히 공약이랄 것은 생각이 나지 않으니, 자신이 이 동네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따위의 인생사만 외쳐대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아니, 백 번 양보해서 그러한 지극히 국지적인 풍경을 빼고서라도, 길거리에 후보자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 한 장 붙어있지 않고, 길바닥에 나뒹구는 명함 한 장 없는데, 오늘이 시의원 선거일이라니.
아무래도 모종의 정치적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카스트로의 사망 1년 후, 이제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마저 국가평의회 의장직 퇴임을 약속하고 치러지는 선거인만큼, 전세계의 떠들썩한 관심을 피해보려는 것일까. 아하, 만일 이 고요한 선거가 그러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것이라면, 글눈을 깨우친 나의 눈 밖으로 달아나는 데는 실패한 셈이다.
철저하게 상향식으로 쌓아나가는 쿠바의 총선 레이스는 5년마다 치러지는데, 그중에서도 쿠바 정치 구조에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시의원 선거일에 마침 아바나에 머물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회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국정원에서 이 공산주의 국가로 얼마나 많은 요원들을 보내었는지, 또 그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럼주 술독에 빠지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특별히 배타적 애국심을 발휘해 국가의 부름이 없이도 자발적으로 그들의 선거판을 첩보한 바를 보고서로 올려 드린다.
문서번호 : K-20171126
발신 : 아헨떼 호따(Agente J), 아바나 지부 임시 요원
수신 : 아헨떼 수프레모(Agente Supremo), 대한민국
문서명 : 쿠바, 아바나 시의원 선거 첩보 보고
0.
수프레모, 저는 마침내 선거일을 맞은 아바나에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린 직후, 공항 내에서 한참 동안 발이 묶이면서 이대로 발각되어 관타나모 고문실로 끌려가 온몸을 제모당하고 손톱 밑을 찔리는 것은 아닌가 두려웠지만, (일단 관타나모는 미군들의 것이고) 그냥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의 모터가 고장이 난 사고로 밝혀졌습니다. 이 정도의 사고쯤 이곳에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의 한 시간 가량 의자도 없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짐을 기다리면서도, 불평하는 사람도, 찾아와서 사과하는 공항직원도 없이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을 보고, 이번 잠행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직감하였습니다. 어쨌거나 잠입 단계부터 큰 위기의 순간을 넘겼지만, 아내는 여전히 이번 여정을 배낭여행으로만 알고 있으며, 저의 정체와 임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선거가 치러지는 2017년 11월 26일은, 놀랍게도 수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입니다. 휴일 선거는 매번 90%가 훌쩍 넘는 투표율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 분명합니다. 적어도 공장 라인이 멈추지 않도록, 투표권을 포기하고 아침 일찍 회사로 출근을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또한 이것은 투표 행위 자체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정도에도 큰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일을 멈추고 해야 하는 일’과 ‘휴일을 반납하고서라도 해야 하는 일’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하게 여겨지는지는 재고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투표권이 만약 일요일에 행사되어야 한다면, 저는 분명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슬픔의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드러누워 투표소로 가려하지 않겠지요. 그러면서, 투표를 거부함으로써 나의 정치적 의사를 표출한다는 둥의 개소리를 남기고 교외로 달아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요일이든 일요일이든 투표의 기회를 대폭 넓혀놓은 지금 우리의 사전 투표제도는 무척이나 훌륭한 장치임에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2.
쿠바 시의원 선거의 투표장은 크지가 않습니다. 선거인 명부에 기재된 대로 대략 100여 명의 사람이 찾아 투표를 하는 곳이니, 동네 중심의 조그만 가게 같은 곳에 소박하게 차려집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수프레모. 제가 선거인 명부를 어떻게 엿보았는지는 잠시 뒤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대신 작은 규모로 잘게 쪼개진 투표소가 몇 블록 단위로 연속되어 이어지기 때문에 아바나 시내를 걷는 동안 계속해서 투표소를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아바나 시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집을 나서서 몇 걸음 가지 않아 자신이 투표할 투표소가 나타나는 셈이기 때문에, 투표소 약도를 그려 넣은 선거 안내문 같은 것을 배포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3.
투표소마다 입구에 진행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너 명씩 앉아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꼭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가 하나씩 끼어 있더군요. 처음에는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로 여겼는데, 여러 투표소를 지나오며 관찰한 결과,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투표를 돕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잔심부름이나 하는 수준이 아니라, 선거인 명부 확인을 돕고, 투표용지를 제공하는 일까지도 말입니다.
아이에게서 일요일을 앗아가는, 범국가적 규모의 아동노동 착취 현장을 제가 목도한 것일까요? 그러한 혐의를 제기하기에는 투표소에 들어오는 이웃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한가한 시간에는 동생의 머리를 땋아주는 그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평화롭고 즐거워 보입니다.
국가의 중차대한 과업을 치르는 데 저 아이들의 일손이 얼마나 보탬이 될지 모르겠지만, 투표소마다 아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은 그 효율과는 별도의 강력한 상징을 가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성인 유권자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소중한 순간을 직접 눈으로 학습하게 하고, 어른인 유권자들에게는 쿠바의 미래이자 곧 이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책임의식을 투표 직전의 순간까지 일깨워주지 않겠습니까.
수프레모! 급식이나 타 먹는 어린놈들이라며 정치와 선거에서 우리 아이들을 멀리 내몰아 가면서, 이 한 장의 투표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학교 앞 편의점에 앉아 고주망태 술 마시는 모습은 가림막도 없이 보이면서, 왜 선거의 과정들은 아이들에게서 꽁꽁 숨기는 것입니까. 심지어 투표연령도 낮추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고작 학생회 선거 정도로 아이들에게 민주주의의 꽃인 투표를 학습시키고 세상에 내보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4.
수프레모, 저의 충심 어린 제언들로 인해 제가 지금 대한민국의 선거 제도를 자해하고 쿠바의 것을 찬양하고 있다고 오해하셔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이 나라의 투표 방법과 비교하여, 대한민국의 투표방식과 과정이 얼마나 선진화되어 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된 바를 소상히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우리의 투표소에 있는 투표도장만 살펴봐도 충분합니다. 인주가 내장된, 잉크가 마르지 않는 도장이라니요! 오직 투표를 위해 이러한 물건을 개발하고 매번 개선하는 나라라니요!
다른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쿠바에는 따로 투표 도장이 없습니다. 투표소에 들어가면 후보자의 이름과 정부의 인장이 찍힌 A4 출력용지를 받게 되는데, 후보자 이름 옆에 그려진 네모칸에 펜으로 X 표시를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 인쇄용지의 품질 등에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다른 선진국가들에서도 많이 쓰고 있는 방식이니 딱히 흠이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투표용지에 2B 연필로 후보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손글씨로 적어내야 하는 일본의 투표방식보다는 월등하게 선진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일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심지어 잘못 쓰면 무효 처리하면서 지우개도 안 준다고 하니, 그쪽에도 요원을 좀 보내셔서 유사 민주주의의 선거는 어떻게 야만성을 잃지 않고 아직 형태를 갖추어 버티고 있는지 잘 좀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5.
이 날 선거로 뽑힌 전국의 1만 2천여 명의 시의원 가운데 절반이 다시 주의회와 인민권력국가회의 의원 후보가 됩니다. 얼핏 보면, 마치 4부 리그 축구팀이 FA컵 결승전을 향해 올라가는 승부의 사다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하부 리그 팀이 준준결승의 문턱을 밟을 일조차 생기지 않습니다. 권력 피라미드의 중간쯤으로 가면 결국에는 공산당이 전부 다 해 먹기 때문입니다. 인민권력국가회의 의원들도 전부 공산당원이고, 국가평의회 의원 자격은 아예 공산당원에게만 주어지도록 법제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승은 결국 프리미어 리그 팀의 것으로 정해놓은, 반쪽짜리 페어플레이인 것에 불과하지요.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래서 이 시의원 선거가 쿠바의 정치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출마자격이 공산당원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100여 명 정도의 동네 주민회의에서 이웃의 추천을 받은 누구에게나 입후보의 길이 열려있고, 일반 국민 모두가 직접 참여하여 직접, 비밀 투표를 하는 유일한 쿠바의 선거이며, 따라서 이 날이 쿠바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치 행위가 벌어지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6.
이러한 투표가 과연 시작부터 끝까지 투명하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질의하신다면, 그 부분은 아직 제가 쿠바 정치계의 더 내밀한 곳으로 침투를 하지 못하여 명확히 회신 드릴 바가 없습니다. 그냥, ‘뭔가 허술해 보이지만, 다들 정직하게 투표를 하는 것 같더라’ 하는 지극히 주관적 느낌 정도만 진술하겠습니다.
대신 제가 쿠바의 투표에서 투명성을 발견한 곳은 전혀 다른 곳인데, 투표장을 기웃기웃 염탐하던 중 눈에 들어온 벽에 붙은 문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글자가 빽빽하게 채워진 스프레드 시트가 출력된 그 문건은 다름 아닌 선거인 명부였습니다. 대략 100여 명의 이름이 나열된 명단으로, 아마도 투표를 하러 온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쉽게 확인하도록 붙여놓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것은 그 정도의 명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개인 신상정보 보호에 관한 개념은 애초에 이 땅에 생겨나지조차 않은 것인지, 이름과 주소, 거기에 주민등록번호까지 모조리 열거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정보를 훔쳐낸다 해도 딱히 써먹을 곳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선거의 투명성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그것도 없다시피 할 정도로 과하게 투명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정도로 부언을 드리겠습니다.
7.
앞서 선거 포스터나 현수막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보고 드린 바, 그렇다면 대체 유권자들은 무엇으로 후보자의 자질을 파악하는지 의아하실 것입니다. 저도 그에 대한 답을 어떤 투표소 앞에 와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후보의 증명사진과 약력이 적힌 A4 사이즈 종이 달랑 한 장. 이것이 이번 선거의 공보물이자 포스터고 명함이며 플래카드인 동시에 유세트럭이자 SMS 문자메시지요 바람풍선인 것입니다.
물론 선거구가 워낙 조밀하다 보니, 굳이 연단에 올라서서 연설을 하지 않아도 누가 어떤 성정을 품고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가까운 이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수프레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박한 종이 한 장의 충격은, 지금 우리나라 선거에서 매번 쏟아붓는 돈이 과연 적당한 크기의 것인지 돌아볼 좋은 단서는 되어줄 겁니다.
수프레모, 끝으로 제가 직접 신상을 파악한 혁명광장 지구의 두 후보자 프로필 정보를 제공하며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이들이 지금은 비록 작은 동네의 의원직에 도전하고 있지만, 언제고 쿠바에도 진짜 민주주의의 길이 열렸을 때, 이들 중에서 국가평의회 의장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모쪼록 파일을 잘 보관해두시기 바랍니다.
후보 1. 펠릭스 알베르토 까르데나스 로만 (Felix Alberto Cárdenas Román)
- 젊은 시절 용접기술을 배운 71세 남성
- 1970년에는 사탕수수 수확에 참여
- 우수 노동자로 각종 수상
- 노동조합 지도자로 다양한 활동
- 문맹퇴치 운동에도 참여
- 현재는 신문사의 유지보수 관리자
후보 2. 까리닫 물린 리안 (Caridad Mullín Rían)
- 세탁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 46세 여성
- 열에너지 분야 중급 기술자격
- 시정부 사회복지사 프로그램
- 예술 강사 코디네이터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