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무거운가 가벼운가

부여 무량사에서의 하룻밤

by 후안

부여 무량사의 극락전에는 동양 최대의 불좌상인 아미타여래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그러니 절의 이름은 아미타불(阿彌陀佛), 즉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리라. (‘아미타(Amita)’라는 말은 ‘무량’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다.)


불가에서 말하는 무량대수(無量大數)는 10의 68 제곱에 이르는, 동양권 수의 단위 중 가장 큰 값이다. (참고로 구글의 어원인 googol은 10의 100 제곱이다.)
그러니 무량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와 양을 말하며, 무량대수는 아미타불의 영원한 수명을 말하는 숫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처음 이 이름을 보았을 때 이와는 정반대로 생각을 했다.
글자 그대로 뜻을 풀어, 양(quantity)이 무(zero)인 상태, 그 무념무상의 공허함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무량하다는 것은 mass가 바닥난 상태, 따라서 어떠한 Force가 밀어내도 조금도 accelerate하지 않는 상태, 운동하지 않는 상태, 조금의 에너지도 없는 상태, 애초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 우주의 모든 힘과 운동이 의미를 주지 못하는 상태, 중력과 시간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상태,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상태, 생명 에너지를 담을 그릇이 애초에 없는 상태, 따라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어떠한 욕망도 번뇌도 존재치 않는 상태를 나는 염두에 둔 것인데, 그렇다면 내 생각이 뻗은 방향은 오리지널 스토리와는 정반대여서, 내가 떠올린 값을 숫자로 가늠해 보자면, 가장 작은 수를 말하는 0.0000000000000000000001의 청정(淸淨)의 값에 가까운 것이 된다.


그래, ‘동양의 신비주의와 물리학’을 마구잡이식으로 연결 짓는 오리엔탈리즘의 놀이는 이런 지점에서 판타지 소설 같은 즐거움을 준다.
그러니까 무한한 무량의 값이 반대로 0에 수렴할 것이라는 이런 나의 오해가, 우주의 총에너지가 아주 아주 작거나 0이 되어야 한다는 현대 우주론의 이야기에 교묘하게 끼워 맞춰짐을 눈치챘는가?
관측 가능한 우주(observable universe)의 모든 물질을 다 끌어모아 봐도, 우주는 임계밀도가 1 m³당 수소원자 10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러니까 우주는 그냥 텅 비워진 진공의 상태라는 것이니, 총량이 무량이고 무한이 0으로 돌아오고 만다는 이 그럴싸한 말장난을 말이다.


이제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으면 적당한 깨우침이나 교훈이 따라 나와야 마땅하겠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도록 짜여진 것이 아니다. 그냥.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돌고 돌다 나갔다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텔레비전도, 한 잔 술도, 야식이나 간식거리도 하나 없이, 108번의 절 후에 어마어마한 양의 식이섬유를 섭취하고, 뜨끈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꿀잠을 자고 일어나, 또 새벽 예불에 참여해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염불 아래 한 시간 동안 버티고 꿇어앉아 있다가, 아침에는 가을비 내리는 경내를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면서, 이러한 따위의 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무익한 생각에 문득문득 빠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나는, 설잠 스님 김시습의 몇몇 에피소드는 견유학파의 그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무량로’라는 도로명은 분명히 무량사 때문에 붙은 이름일 텐데 왜 무량사의 주소는 무량로 1이 아니고 203이어야 할까, 무량사 앞 조그만 마을 외산면에는 어떻게 교회가 3개씩이나 성업할 수가 있을까, 간식을 좀 챙겨 올 걸, 커피 마시고 싶다, 속세로 내려가면 점심에 뭘 먹지, 들어오기 전에 주차장 옆에 있던 가게에서 돈가스를 먹었어야 했는데 등의 생각을 이어 붙여가며 하루를 지냈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