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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잔인하고 중력에는 자비심이 없다

조지아, 트빌리시, 나리칼라 요새에 올라서서

by 후안

"그날 오후 ‘테라스’에는 관광객 일행이 찾아왔다. 빈 맥주 깡통과 죽은 꼬치고기 사이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 여자가 문득 끄트머리에 거대한 꼬리가 달린 길고 엄청난 흰 등뼈를 발견했다. 동풍이 항구 밖에서 줄곧 거센 파도를 일으키며 불고 있는 동안 그 등뼈는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낸 채 조류에 휩쓸려 흔들리고 있었다."

⋯⋯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그래, 시간은 잔인하고 중력에는 자비심이 없는 법이지. 그 상어같이 악랄하고 영원한 힘을 등에 업고, 비와 바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성벽을 야금야금 갉아내고 있는 중이다.


한나절 돌벽을 데웠다 밤사이 식히기를 멈추지 않는 부지런한 태양부터, 잠깐 앉아 날개를 쉬었다 다시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저 앙상한 새 한 마리까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이 이 성벽에 구멍을 내고 키를 낮추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몸을 숨길 그늘 한 뼘 허락되지 않는 이 곳, 올드 트빌리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높은 곳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나리칼라(Narikala) 요새는, 그래서 나에게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고 만다.

여기저기 덧바른 응급 처방으로 겨우 버티고는 있지만, 이제 삭신 구석구석 성한 곳이라고는 하나 없는 이 노쇠한 성벽을 이렇게 밟고 올라서도 되나 싶은 것이다.


들리지 않는가, 걸음마다 부스럭부스럭 쇠약하게 흘러나오는 이 성벽의 지친 비명이.

“너무 피곤해서 더는 버틸 수가 없어. 이제 그만 산산이 허물어져, 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면⋯⋯”





조지아가 시달린 침탈의 역사를 개략적으로나마 이해하고 나면, 무려 4세기에 지어져 아직 이 자리에 버티고 있는 나리칼라 요새의 피로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서쪽에서 로마가 왔고, 그 뒤 동쪽에서 몽골이 몰려왔다. 다시 서쪽에서 오스만이 오더니, 곧장 남쪽에서 페르시아가 밀고 올라왔고, 그 둘의 패권 다툼은 조지아를 전쟁터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조지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또한 따뜻한 남쪽으로 향하기 위해 북쪽의 캅카스를 넘어 러시아 제국이 왔다.


현대에 이르러, 조지아가 소비에트 연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 1991년, 남오세티야를 놓고 러시아와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 국호를 그루지야에서 조지아로 바꾼 것이 2008년이니, 그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은 사실상 얼마 되지 않는 세월 동안의 일이다.


이 정도 되면, 로마 제국, 몽골 제국,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제국, 아랍 제국, 러시아 제국, 세상의 그 많은 제국들이 이 땅을 왜 그렇게 욕심 내었는가 하는 것보다 더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역사 내내 이 수많은 제국들의 일부로 처참하게 시달렸던 조지아가 어떻게, 하나의 국가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가련한 성벽은 1827년에는 지진에 흔들리며 여기저기 허물어지기까지 했지만, 아직 겁 없이 성벽 꼭대기를 기어오르는 무모한 젊은이들의 체중을 버틸 정도의 기력은 남았나 보다.


제대로 난간도 없는 성벽 끝에 아슬아슬 걸터앉아 절벽을 향해 두 다리를 내어 흔드는 사람들부터, 이미 계단이 망실된 탑의 무너진 돌벽을 사다리처럼 타고 꼭대기로 기어오르는 사람들, 망루에 올라 아무런 안전장비도 없이 백 텀블링을 돌며 시선을 끄는 재주꾼까지, 모두들 이곳의 탁 트인 전망을 앞에 놓고 차분히 명상에 잠기기보다는 흥분감에 젖어 날뛰기로 합의를 본 듯하다.


아내를 잠시 탑 아래 쉬게 한 뒤, 나도 용기를 내어 요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보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것보다 훨씬 아찔한 등반을 치루어야 했다. (부들거리는 발길로 오르내리는 길에 몇 개의 돌멩이라도 굴러 떨어트리는 일에 나 또한 가담했다면, 용서하세요, 조지아여. 반드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풍경이 있었습니다.)


꼭대기에 이르러 손바닥의 흙을 털어내며 허리를 펴자, 요새의 뒤편 식물원과 목욕탕 지구가 있는 절벽을 포함해, 트빌리시의 정경이 막힘 없이 사방위로 조망된다.





나는 본다. 팔백 년 전, 이곳에 서 있던, 한 어린 병사의 모습을.

뙤약볕 아래, 그때는 이곳에 존재했던 돌난간에 몸을 슬쩍 기댄 채 자꾸만 쏟아지던 잠을 떨쳐내려 애쓰고 있는 이 소년병의 이름은, 아마도, 기오르기(გიორგი, Giorgi), 다음 달이면 열네 살이 되는 나이다.


소년은 빳빳하게 펼친 손바닥을 눈썹 위로 붙여 해를 가리고는, 두 눈에 힘을 잔뜩 준다. 저기 남쪽, 쿠라 강의 하류 쪽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흙먼지 구름이 조금씩 크게 부풀어 오르고, 그 형체가 또렷해지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오고 있다, 수백 마리의 군마들이. 남으로 카스피해를 휘돌아 캅카스를 향해 북상하는 칭기즈 칸의 군사들이 드디어 이곳까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기 보입니다! 적들이 이제 이곳까지 몰려왔습니다!”


감시탑 아래로 목이 찢어져라 정찰 내용을 보고하는 기오르기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차라리 비명에 가깝게 요새 안에 울려 퍼진다.

이윽고 요란한 종소리가 꼬리를 물고 산 아래로 이어지며 울리고, 왕국의 백성들이 언덕을 뛰어올라 이 요새 안으로 숨어들었겠지.


텅텅 비어있는 마을에 도착한 몽골군들은 여유 있게 진을 펼치고는, 갑옷과 칼날에 묻은 호라즘 왕국의 피를 강물에 씻어 내고, 지친 말의 목을 축이며 농성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집집마다 묻혀있던 단지 속의, 그 달콤한 향과 새빨간 빛깔의 신비로운 술에 며칠은 흥건하게 젖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며칠 후 장군이 포함된 후발대가 도착해 숙취로 낮잠에 늘어진 병사들 몇을 매질하여 전열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곳 아래에서 쏘아 올린 궁수들의 화살이 이 높은 요새 안까지는 날아들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그저 요새 아래 죽치고 앉아 가련한 피난민들의 식량과 물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물보다 먼저, 요새 안에 비축해둔 와인이 모두 바닥나자마자, 순순히 성문을 열고 투항했을 수도.

불쌍한 기오르기는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서럽게 엉엉 울면서 감시탑을 비워줘야 했을 것이다.




미사일이 지구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와 한 평 안 되는 목표물에 내리 꽂히는, 이토록 사악한 지금의 시대에 와서는 더욱, 이런 옹색한 돌벽이 더 무슨 역할을 하겠냐만, 이 요새는 트빌리시를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그림이고, 여전히 조지아인들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든든한 버팀벽이 되어 이곳에 아슬아슬 서 있다.

그 잔혹한 침탈의 세월을 인고해, 어쨌든 지금도 무너지지 않고 시간과 중력에 맞서 여기 앙버티고 있지 않은가.


시선을 조금 가까운 곳으로 돌려, 이제 내가 다시 내려가야 할 곳, 트빌리시의 오래된 마을을 내려다본다. 오랜 세월, 이곳에서 저곳으로 피가 흘러내렸을 것이나, 이제는 평화롭게 밝혀진 황금색 불빛을 타고, 와인의 향기와 흥에 겨운 노랫소리가 골목골목 어지럽게 흘러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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