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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베리타스의 복수: 종교 정화 프로젝트

조지아, 트빌리시에 있는 조금 특별한 모스크 이야기

by 후안

<시놉시스>

지구상에 현생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최고의 지능과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 칭송받는 베리타스 박사.

어린 시절 그의 첫사랑에게 던진 첫 고백은 어처구니없는 연유로 처참히 짓밟히며 시작과 동시에 그 끝을 보아야 했다.

“미안하지만, 부모님이 불신자(不信者)와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으셔서…”


태어나 처음으로 원하던 것을 얻는데 실패한 베리타스는 크나큰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지만, 그는 더 강한 자기 확신에 기대어 무너져가는 정신을 붙들 수 있었다.

‘그녀가 저토록 사랑하는 신의 힘을 내가 가질 수만 있다면, 아마 그녀의 마음은 내 것이 되고 말 거야.’


몇 달의 시간이 흘러 어느 겨울 축일의 밤, 베리타스는 드디어 삼중수소가 아닌 지구 대기 중의 풍부한 수소를 냉장고 크기의 토카막 내에서 실온 상태로 플라스마 화하여 일체의 방사능 폐기물의 방출 없이 거대 에너지를 생성하는 데 성공한다. (하여간 뭐가 되었든 간에 엄청나게 불가능해 보이고 말도 안 되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과학적 진보를 혼자 이뤄낸 것으로 하고 대충 넘어가기로 하자.)

그는 전지전능한 신의 힘을 본떠 인류와 우주의 미래를 완전히 뒤바꿔놓을 이 놀라운 연구의 성과를 자신의 첫사랑에게 선물하기 위해 허둥지둥 그녀의 집 앞으로 달려가는데.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어느 낡은 자동차 안에서 한 남자와 뜨겁게 키스를 나누고 있는 첫사랑 그녀의 황홀한 표정이었다. 상대는, 고작해야 수준 낮은 8비트 리듬 정도만 겨우 둠칫닷칫 두들겨대는 같은 종교시설 청년반의 드러머 오빠가 아닌가.

어두운 골목길 가로등 뒤에 몸을 숨긴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베리타스는, 두 사람의 입김과 열기가 차창을 완전히 가려버릴 때가 되어서야 겨우 비틀비틀 뒤돌아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베리타스는 이 부조리에 빠진 인간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어렴풋이 마음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종교 정화 프로젝트 R.I.P. (Religious Irrationality Purification)

지구상에서 종교를 완전히 지워내는 것, 그리하여 인간의 순수한 지성을 회복하고 미래 인류를 구원하는 원대한 계획이 그때 시작된 것이다.


이후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한 베리타스는 과학사의 수많은 난제들을 연이어 파훼하며 그 기술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이고, 하나의 국가 규모에 필적할 만한 동산 및 부동산 자본과 군사력까지 손에 쥐게 되는데. 지구상에 베리타스 박사와 같은 아픔을 겪어야 했던 천재 공학자들이 적지 않았던 덕분에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동료 과학자들의 수는 암암리에 점점 늘어만 갔다.

모여든 과학자들 모두 가련한 동기와 불타는 의지를 바탕으로 연구에 함께 매진한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초끈이론, 초대칭이론은 물론 우주 암흑물질의 비밀, 양자중력, 핵물리학 등등의 우주의 모든 신비를 깨닫는데 이르렀으며, 그 기술력을 집대성하여 곧 강력한 화력을 가진 살상용 무인 공격기를 개발해내고, 연구개발에 참여한 동료 과학자들의 협력에 상호 감사의 뜻을 표하며 이 드론을 ‘크루세이드(Crew’s Aid)’라 명명한다.


드디어 심판의 날에 이르러, 베리타스 박사가 점화 버튼을 누르자, 인간적 융통성 같은 건 깡그리 제거한 냉철한 인공지능이 탑재된 살상 기계, 크루세이드가 도시의 상공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 킬링머신은 종교와 관련된 모든 시설, 구조물, 사물들을 찾아내어 레이저로 녹여버리고, 종파에 관계없이 신앙심이라 할 만한 심리 체계를 가진 인간들을 빠짐없이 적발해 모조리 증발시키며 지구를 휩쓸고 다닌다.


이러한 환란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신앙심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은 문명에서 멀리 달아나 지하세계의 안전한 장소를 찾아내고, 그곳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의 추종자들이 모여 단 하나의 신전을 지어 올리게 되는데.

이제 그곳에서도 이들은 자신의 경전과 총칼을 휘둘러 이교도들의 피로 성전을 붉게 적실 것인가, 아니면 그들 모두의 유일신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 겁에 질린 어깨를 기대어 서로 위로하고 지친 손을 맞붙들어 다 함께 기도를 하게 될 것인가.




조지아는 AD 337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기독교를 국교화한 나라다. 그리고 그 이후로 페르시아, 셀주크, 아랍의 왕조들, 몽골, 오스만까지 끝도 없는 침략에 시달리면서 그 신앙을 오늘날까지 지켜왔다.

조지아 전역에 부지기수로 흩어져 있는 오랜 교회 유적들마다 그 신성한 순교의 역사를 증언하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묻혀 있고, 이 나라 바깥의 많은 신실한 사람들까지 (아니, 나처럼 불신실한 이들마저도) 그 묵은 스토리와 흔적들에 이끌려 온갖 종류의 카메라를 하나씩 손에 쥐고 이 곳을 찾아오기 바쁘다. 조지아를 처음 찾는 그 누구라도, 그 여정은 아마 이 이야기들을 하나씩 따라가는 것으로 쉽게 선 그어질 테지.


하지만 그 거대하고 유명한 이야기들에 가려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도 여행이 주는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여행 준비 기간이 촉박했던 나는, 급한 대로 인터넷에서 트빌리시 여행 팸플릿을 구해서 살펴보다가 거기에 조그맣게 적힌 이야기 한 꼭지를 발견하고 무척이나 흥분감에 들떴다. 그것은 트빌리시 올드타운의 목욕탕(Abano) 지구 뒤쪽 오르막길에 위치한 독특한 모스크에 관한 이야기인데, 사연인즉 이러하다.


원래 트빌리시에는 쿠라강을 가운데 두고 이슬람 모스크가 두 군데 세워져, 1400년째 싸우고 있는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구 소련 시절, 스탈린의 명령을 받잡은 소비에트군이 쿠라강 남쪽 편에 있던 시아파 모스크를 산산이 박살 내버렸다. 하루아침에 기도 드릴 곳을 잃어버리고 오갈 데가 없어진 시아파 신도들을 받아준 곳이, 강 건너편에 있던 수니파 모스크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은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아파와 수니파가 함께 기도를 올리는 모스크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지아에 넘쳐나는 수많은 기적의 간증들에 비견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이 놀라운 이야기를 지나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나는 지도를 더듬어 등대와 닮은꼴을 하고 있는 이 모스크를 찾아갔다.

건물의 입구에는 무슬림으로 보이는 남성 십여 명이 둘러서서 시끌벅적 토론을 벌이며 뭉게뭉게 담배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모스크 입구로 보이는 곳에 몸을 기울여 머리를 슬쩍 집어넣고 안을 기웃거리면서 들어가 봐도 되냐는 신호를 보내자, 사내들로부터 ‘물론이지!’ 하는 경쾌한 몸짓이 돌아왔다.

이 쪽 종교에 관해 무지렁이인 처지지만, 남녀 기도실이 구분된다는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에, 아내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 보았다.


글을 이어오는 동안 수차례 고백했다시피, 신념을 가지지 못한 나의 눈이 아직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제대로 찾아내기에는 배경지식이 부족하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들어가 보았던 다른 모스크와 특별한 차이점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아이콘이나 조형물들이 없는 모스크의 내부는, 몸을 엎드릴 수 있는 바닥과 기도 소리가 울리는 공간, 그 삼차원의 공간 자체에 항상 더 큰 의미가 있는 것만 같다.

몇 개의 기둥으로 버티고 있는 사각의 공간 안에서 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 청년 하나와 부지런히 아래로 몸을 던져 기도를 하고 있는 한 남자가 내가 본 전부였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애써 찾은 걸음인데 뭐 대단한 걸 건지지 못한 탓에 심드렁히 모스크를 나선다. 입구의 남성들에게 다시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몇 명이 가벼운 고갯짓으로 응수해 주고 다시 자기들의 대화로 돌아간다.

모스크 앞에 웅웅거리며 서 있는 자판기에서, 아내가 커피 한 잔을 받아내는 동안, 나는 다시 그 사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내들은 여전히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중간중간 껄껄거리며 크게 웃기도 하고, 누군가를 놀려대며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저들 가운데 누가 시아파이고, 어떤 것이 수니파의 표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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