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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의 기도법

조지아, 트빌리시 올드타운의 오래된 교회 안에서

by 후안

느린 걸음으로 어슬렁 트빌리시의 올드타운을 거닐다 보면 종종 오래된 교회 건물들이 불쑥 눈 앞에 나타난다. 안내 지도 한 장 없다면 무심히 지나치기 딱 좋게 생긴 이 동네 교회들은, 무려 6세기에 지어진 시오니(Sioni) 대성당과 안치스카티(Anchiskhati) 바실리카 교회다.


주변의 건물들 사이에 낮은 키로 몸을 낮추고 있는 이 인류의 고귀한 문화유산에는, 입장권을 파는 번듯한 매표소도, 어깨에 힘을 준 경비원도, 관광객들이 줄을 늘어선 포토존 같은 것도 없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은 오히려 골목 맞은편에서 성업 중인 식당이기 때문에, 만약 허기가 진 상태로 길을 지나던 중이었다면 시선을 빼앗겨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리라.

그저 이 늙은 교회는, 동네 신작로에 나와 종일 말없이 앉아있는 노인처럼, 묵묵히 그 자리에 수백 년 된 기단석을 박아 피곤한 몸을 버틴 채로, 입구의 조그마한 나무문 두 짝을 활짝 열어놓았을 뿐이다.


열 명 가운데 여덟 명이 조지아 정교회 신도인 마을 주민들은, 바쁜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던 길에도 잠깐씩 멈춰 서서, 몇 번씩이나 반듯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몸 위로 성호를 긋는다.




옷을 단정히 입고, 사진 촬영을 하지 말 것. 낯을 많이 가리는 이 영감의 요구사항은 그저 이 두 가지 정도일 뿐, 까다로운 구석은 없으니 고분고분 말을 들어주어야지.

카메라를 가방 안에 넣어두고, 행여 내쉬는 숨소리마저 방해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호흡으로, 안치스카티 교회 안으로 들어서 본다.


비록 신심은 없는 처지지만, 여행 가는 곳마다 꼬박꼬박 오래된 성당들을 찾게 되는 나는, 동방정교의 고적지에 들어서는 지금 이 순간, 어쩔 수 없이 콘스탄티노플 서쪽 편의 위대한 건축물들을 기억해내게 된다.

그 목적과 용도가, 통성 기도를 조금 더 빠르고 확실하게 하늘에 닿게 하기 위함인지, 황제마저 무릎 꿇리는 교회의 위엄을 그만큼의 크기와 중량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내가 본 것은 도시의 어느 길에서나 올려다볼 수 있는 높은 교회 첨탑과 종루, 위대한 파사드들이었다.


이곳 동방정교의 외형적 특징들은 그것과 비교되어, 누구라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는 것들이다. 이곳에는 육중한 돔 위에 균형을 잡은 거대한 십자가도, 성전의 높은 벽에 생생한 현실감으로 내걸린 십자가의 예수상도, 지붕 처마 아래에 숨어 인간을 염탐하는 온화한 천사도, 흉측한 가고일도 없다.

그저 낡은 흙기와를 얹은 지붕 아래로 두 계단짜리 나지막한 제단과 몇 평 되지 않는 예배 공간이 전부인 곳, 내부를 환하게 알록달록 밝히는 스테인드글라스도 없어, 박공지붕 아래 뚫린 작은 창으로 조그마한 빛이 겨우 새어 들고, 구석진 곳에는 몇 개의 촛불과 전구를 보태어 놓은 어둑하고 습한 곳이다.


그래도 그 낡은 벽면과 벽감에는 이콘들이 걸려 허전한 공간을 채워주고 있다. 이 이콘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받아 뒤늦게 그려 넣어진 것인데, 그럼에도 천 년의 세월은 훌쩍 넘긴 것들이라고 하니 조심스럽게 다가가 감상을 해본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이 이콘들은 모두 만화처럼 과장되어 계란같이 둥근 머리 모양에 왕방울만 한 눈동자로 그려져 있다. 마치 아이의 그림처럼 정답기까지 한 이 동방정교의 독특한 화풍과 단조로운 장식들은, 확실히 사람들을 불신지옥의 공포에 빠지게 할 목적은 아니었으리라.




빈 의자를 발견하고 잠시 앉아본다. 조마조마하던 호흡을 이제 조금 느슨히 풀어주면서, 아까 교회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나의 신경을 잡아끌던 두 가지 풍경들에 집중한다.

하나는 제단 앞에 무릎 꿇은 한 청년, 또 하나는 입구 근처 테이블에 있는 두 명의 성직자들이다.


청년은 비탄에 빠져 울고 있는 중이다. 잔뜩 구부러진 그의 등이 들썩거릴 때마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그 떨리는 기도를, 이 좁은 공간 안에서는 모른 척하기가 힘들다.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을 했거나, 아니면 아예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병들었거나, 오래된 우정에 금이 갔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중이거나 전 세계적인 분배의 불균형 문제를 탄식하는 중이면 또 어떠랴. 저렇게나 서럽게 울고 있는데 말이다.

가만히 다가가 그 지친 등에 손을 얹어주지는 못해도, 저 남은 울음과 기도를 마저 다 쏟아내고 나서 청년의 귀갓길이 조금이나마 홀가분해지면 좋겠다 하고 나는, 기도라면 기도일, 작은 바람을 한 겹 더 보태어 보았다.


이 숨죽인 기도 소리를 빼면, 이 고요한 공간 안을 거의 다 채우고 있는 것은 예복을 차려입은 두 명의 성직자 사이에 오가는 토론의 음성이다.

한 명은 의자에 앉아 있고, 또 다른 한 명은 그 의자에 손을 얹어 어깨너머로 머리를 들이밀고는, 함께 스마트폰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중이다.

가만히 보아하니 유튜브로 축구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면서 이러쿵저러쿵 플레이를 평가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심각한 실랑이가 오가는 와중에 감시망을 피한 관광객들 몇 명이 몰래몰래 사진을 찍어대고 있다.

그래, 그렇게까지 고리타분한 노인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이 풍경이 좋았다.




발이 아프도록 그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좁은 나선의 계단을 오르내렸던 다른 거대한 교회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것으로 내 할 일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 얼른 빨리 다른 곳을 보러 가야지, 다음 일정에 늦지 말아야지 하는 조급함도 아예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이 평화로움 속에 지친 다리를 놓아두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물속에 가라앉아 있기라도 하듯 공간 가득히 웅웅대는 이국의 언어와 기도 사이에서, 저 정교하지 못한 삐뚤빼뚤한 벽돌 벽과 오래된 장식들 앞에서, 이 서툴고도 낡아빠진 어리석은 진심들 안에 갇힌 채로, 내 속의 슬픈 말들과 고백들이 제멋대로 고해하며 자꾸만 또렷하게 들려왔기 때문에, 이러다 저 무너져 앉은 청년의 울음이 내 것으로 축축이 옮아 올지도 몰라서, 나는 서둘러 밖으로 달아나 세속의 햇빛 아래 젖은 마음을 말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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