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제 카드 못 보셨나요?

여행 기념품이 버려지거나 살아남는 방법에 관해

by 후안

지난 주말, 아내와 동네 단골 카페의 볕 좋은 자리에 앉아 잠깐의 낮시간을 보내었다. 집으로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카페에 가지고 갔던 책의 마지막 챕터를 마저 읽으려 손에 펼쳐 들었을 때였다. 그 자리에 꽂아두었던 갈피표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도대체 그것이 언제 어디서 갈피를 빠져나갔는지, -그렇다, 말 그대로 나는-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실직고하자면 나는 청바지에 매달려 오는 길쭉한 모양의 카드보드 재질 태그라든지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포스트잇 플래그,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명함 따위를 손에 잡히는대로 책갈피에 끼워 넣는 편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제대로 된 갈피표라는 것이 단 하나도 없고, 당장 어딘가로 사라져 버려도 읽던 자리를 되짚어 내는 일이나 귀찮아질 따름이지 크게 안타까울 것도 없다.


그런데 지금 사라진 이 갈피표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은 2011년 파리 여행 중에 내 수중에 들어온 물건이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도 몽마르뜨 언덕을 내려와 셍삐에흐 광장을 빠져나올 때 누군가 내 손에 건네주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니 유명인사를 실사처럼 본뜬 밀랍인형이 전시되어 있다는 그레뱅(Grévin) 박물관의 입장료 10% 할인 쿠폰이었다. 마담 투소든 그레뱅 박물관이든 볼 것들이 넘쳐나는 파리의 첫 여행 중에 그곳을 찾을 생각이야 전혀 들지 않았지만, 그 쿠폰에 인쇄된 그림이 너무 재미있어서,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다.




아시다시피 여행이 끝난 후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잡다한 기념품들을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가혹하다. 주머니나 지갑, 힙 색, 여행 책자 사이에서 처참하게 압사된 채 고대 유적처럼 발굴되어 나오는 수많은 티켓들과 영수증, 팸플릿 조각들 말이다. 미련이 많은 여행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작은 인쇄물들까지 기념품들이라 여겨 그 자리에서 버리지 못하고 돌아오는 행낭의 무게에 몇 그램씩을 보탠다. 그렇다. 가슴을 뛰게 하는 미지의 언어들이 그려져 있고,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그날 그곳의 먼지들이 묻어 있는 그 작은 종이들을 어찌 쉽게 구겨 버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함께 국경을 넘어온 이 작고 사랑스러운 물건들의 운명은 그 뒤로 어떠한가. 대개는 이미 그것과 같은 처지에 놓인 물건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내가 이름 붙이기를- ‘추억의 서바이벌 상자’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씩, 대개는 봄날 대청소 주간에 맞춰 다시 세상의 빛을 본 후, 나에게 선명하게 그날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휴지통으로 숙청되지 않는가.

말하자면 그것들의 수명은 딱 우리 기억의 수명만큼이며, 그 여행이 선물한 즐거움의 크기만큼이다. 그리고 서랍 속에 그만큼 빈 자리를 다시 쓸데없는 물건들로 채우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카드는 여행이 끝난 뒤로도 내 책상 위에 이곳저곳을 굴러다니며 십 년이 넘도록 살아남았다. 인쇄 품질도 그럭저럭인 데다 디자인도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에게는 매번 낯선 곳을 향한 향수를 적셔주고 또 다른 여행에의 갈망을 달래주는 작은 부적이 되어주었던 물건인 셈이다.


카페에서 집으로 왔던 길을 되짚어, 반드시 찾아오리라. 나는 다시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탈주자를 추적하는 탐색견처럼 열심히 길바닥을 두리번거려 보지만 결국 반환점인 카페 안으로 다시 들어설 때까지 아무런 자취가 없다. 우리가 앉았던 자리에는 한 여인이 달콤한 커피 한 잔을 놓고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내가 그 자리를 기웃기웃거리는 것을 알아채고는 놀란 눈으로 나를 경계한다. 나는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뒤로 물러나 카페 주인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밖에.


“사장님, 혹시 여기 떨어져 있던…… 카드 한 장 못 보셨어요?”

그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도, 카페 주인도, 뒤에서 어깨너머로 내 말을 엿들은 다른 손님들까지, 각자 구획이 할당되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주변의 바닥을 열심히 두리번두리번 살피기 시작했다.


“카드라면, 신용 카드요?”

카페 주인이 물어왔다.

“아뇨, 그런 카드는 아니구요.”

나는 말을 멈추었다.

‘신용카드가 아니라면, 어떤 카드를 말씀하시는지?’ 하는 표정으로, 카페 주인이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카페의 주인과 손님들이 실마리를 기다리는 그 말이, 내 머릿속에 몇 줄로 문장 지어지면서. 나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밀랍인형처럼 그 자리에 꼼짝 못 하고 얼어붙어 버린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설령 그 카드가 이제 두 번 다시 내 손에 돌아올 수 없게 되더라도. 나는 단 한 마디도 더 말할 수가 없다.


만약 입을 연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야 하니까.

“영연방 왕국의 국왕으로 최근에 즉위 70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프랑스의 국조인 수탉의 그림이 가슴에 새겨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 레블뢰의 넘버 텐, 지네딘 지단의 유니폼을 착용하고, 약간 다리를 벌린 의기양양한 자세로 버티고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사진이 새겨진 카드를 못 보셨냔 말입니다!”


대신 나는 침묵을 택했다. 입을 꾹 다물고 체념하여 돌아서는 나의 뒷모습을 향해, 카페 사장은 친절하게도 “혹시나 찾으면 보관해 드릴게요.”라고 외치지만, 나는 외려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친다. 그리고 마음과 전혀 다른 말을 뱉으며 그 자리에서 달아나고야 만다.

“아니오. 버리셔도 됩니다!”




허탈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그날 저녁, 책상 한 편에 곱게 놓여있는 여왕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마도 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것을 빼내어 익숙한 자리에 툭 던져두었나 보다. 마지막 챕터는 갈피표가 없어도 쉽게 찾아지는 것이니까.


그렇게 여왕님은, 나의 HMS(Her Majesty’s Souvenir)는, 또다시 스스로 살아남아 앞으로도 몇십 년을 더 나의 이 책 저 책 사이를 돌아다니실 예정이다. Long live the Queen!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