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똑같은 단풍의 사진을 찍는 일에 관하여
<전사편(前史篇) ½>
유기견이나 유기묘처럼, 나무도 유기목(遺棄木)이라는 것이 있을까?
집안 화분에 담겨 사람의 손에 돌봄을 받는 나무가 아니라면, 산과 들에 뿌리를 내려 제 스스로 거름을 찾고 말없이 비를 기다려야 하는 가련한 신세의 나무라면, 애초에 모두 다 유기목이라 봐야 할까?
아마도 이런 생각은 오직 인간을 자연의 중심에 둔 교만한 구상은 아닐까?
방향을 바꿔 좀 더 전통적이고 동양적 자연관으로 생각의 틀을 넓혀 들여다보자면, 그러한 경우는 외려 자유목(自由木)으로 불려야 더 옳지 않을까?
그래, 자유목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대척점으로 , (비록 제한적이긴 하나 화분을 타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닐 수 있는 활동성을 부여받았음에도) 집안에서 관리를 받는 나무는 '구속목' 또는 '속박목'이어야 할까?
위와 같은 질문들을 따라오다 보면, 우리는 교목이니 관목이니 하는 기존의 분류의 틀에서 벗어나, 나무의 상태를 구분 짓는 완전히 새로운 범례를 얻을 수 있게 되는데, 이 분류의 곁가지 중 하나에 결국 '구조목(救助木)'이라는 범주가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사실에 수긍하게 될 것이다.
많은 경우 버려졌다가, 다시 구조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한 그루의 나무가 진정한 구조목이라는 종개념의 테두리 안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첫째, 한때 구속목이었다가
둘째, 유기목으로 전락한 후
셋째, 다시 사람의 손에 생명을 건져 구조목이 되는
세 개의 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쳐야만 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여기서 순서가 빠지거나 뒤바뀔 수는 없는데, 예컨대, 구속목이었던 전력이 없는 나무는 유기목이 될 전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자유목이기 때문에 곧장 구조목이 될 수 없는 바, 동네 뒷산에서 훌륭한 적송 묘목을 발견하고 베란다 화분에 옮겨다 심었다고 해서 그것이 구조목이 될 리는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절취목(竊取木)'이고, 형법상 특수절도죄라는 것을 잊지 말라.
<전사편(前史篇) ²⁄₂>
나의 정원에는 위의 서사구조에 정확히 부합하는, 구조목이 한 그루 서 있다.
이 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약 사 년 전, 옆 건물의 주인이 건물 모퉁이에 화단을 만들고 돈을 들여 사다가 옮겨 심어 놓은, 귀중한 구속목이었다.
나무에게도 의식이라는 것이 있다면, 비록 양묘장의 친구들과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음에도 이제 평생을 뿌리내리게 될 양지바른 자리로 분양 당첨되어 무척이나 설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엽게도 자신이 건축법 제42조를 교묘히 회피하기 위한 눈속임용 제물이었다는 것까지는 일말도 눈치 채지 못했겠지.
준공심사가 완료되자 이제 그 필요를 다한 임시 화단은 그 누구도 돌보지 않아, 얼기설기 대충 쌓아놓은 시멘트 블록 사이로 무르지 못한 배양토가 계속 유실되었고, 나무는 오뉴월 가뭄에 물 한 컵 떠먹여 주는 사람 없는 유기목이 되고 말았다.
공기 중으로 서서히 뿌리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슬로 모션으로 실신하는 사람처럼 조금씩 줄기가 기울어지는 꼴을 며칠간 지켜보던 아내와 나는, 결국 건물주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나무가 완전히 고사하기 전에 옮겨 심게 해달라는 부탁에, 다행히 그쪽에서도 나무의 구명을 부탁해 오면서, 상호간 합의하에 나무는 이제 구조목이 된다.
겨우 두어 줌 정도 되는 흙을 움켜쥐고 인사불성이 되어가던 나무를 서둘러 옥상으로 옮기고, 화단 한편 해가 잘 드는 곳에 깊은 구멍을 내어 뿌리를 단단히 밟아 묻고 나서, 가지 끝부터 뿌리까지 넘치도록 물을 적셔준 후, 우리는 이 나무가 죽을지 살지 그저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나는, 오로지 이파리 생김새 하나만 실마리로 하여 인터넷에서 나무의 수종(樹種)을 수소문한 끝에, 복자기, 나도박달나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목질이 강인하여 옛날부터 수레바퀴의 축이나 병사의 창대를 만드는 데 쓰였으며, 무엇보다 가을 단풍의 색이 곱고 진하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그해 가을은, 성하게 붙어있는 이파리가 몇 장 남질 않아 단풍을 보지 못하였지만, 겨울을 무사히 넘긴 나무는 다음 해 봄부터 완전히 건강을 회복해 무럭무럭 자라나더니, 마침내 불꽃같은 생명의 증표인 양 화려한 단풍을 나의 정원에 활활 피워 올리게 되었다.
나는 감사의 의미로, 나무에게 복자씨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본편(本篇): 이토록 길고 지루하며 불필요한 농담의 끝에 이르러, 정말로 내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중략)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시작 페이지에서
딱 일 년 전, 그리고 이 년 전, 삼 년 전 이때처럼, 복자씨는 또 눈이 시리도록 새빨간 단풍을 드리웠다.
작년에 빛을 다하고 떨어져 내린 낙엽들을 다시 제 거름으로 삼아, 키를 한 뼘 올리고 이파리를 듬뿍 늘리더니, 올해는 더 밝은 빛으로 활짝 펼쳤다.
나는 이로써 벌써 삼 년째 복자씨의 단풍을 마음껏 즐기게 된 것이다.
아주 짧은 기간 눈부신 선홍빛으로 빛나는 그 광경을 멀끔히 눈으로만 구경하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사진으로도 열심히 기록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오늘 나는, (구글 포토 덕분에) 매년 거의 같은 날에, 같은 위치에서, 같은 단풍 사진을, 같은 구도로 몇 년째 찍어오고 있음을 알게 되어, 적잖이 어리둥절한 기분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똑같은 사진을 매년 찍어봐야 무슨 소용이지?
재작년, 작년에도 찍었던 사진이고, 내년에도 후년, 내후년에도 똑같이 찍을 사진이라면 말이야.'
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나는 매년 반복되는 나무의 길고 지루한 삶에 드리워진 반복성, 순환성, 재귀성, 회귀성 따위의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후였다.
뱅글뱅글 천천히 돌아가는 식물의 생장 연대기가 마침내 죽음이라는 생명의 타래 끝으로 달려가는 것을 오만하게 막아 세운 형벌로, 나 역시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위대한 시간의 직진성을 상실하면서, 가을이 올 때마다 나무 앞에 서서 두근두근 단풍을 기다리면서, 계절마다 꽃잎처럼 카메라 셔터를 열었다 닫아가면서, 식물계의 영원히 돌고 도는 시간 안에 갇히어, 복자씨에게 접붙어 곁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야 만 것이다.
여름이 기운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진다. 가을이 온다. 복자씨의 엽록소가 파괴된다. 안토시안이 생성된다. 잎이 붉게 물든다. 나는 그 앞에 서 있다. 나는 뿌드득뿌드득 팔을 뻗는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찍는다. 잎이 떨어진다. 겨울이 온다. 봄이 온다. 여름이 온다. 다시 여름이 기운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원한 사건의 연쇄 안에, 나는 이제 꼼짝없이 갇혀 어디로도 달아날 수가 없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건들, 이 논제에 관한 고민은 비단 니체 정도 되는 위대한 철학이 이름 붙인 '영원한 회귀'의 사상씩이나 되지 않더라도, 일요일 다음에 다시 월요일을 맞아야 하는, 24시간제 안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덤벼본 적이 있는 만만한 문제이고, 아직 해결되지 않는 걱정거리일 것이다.
그러니 나의 질문들은 결국에는 또 답을 찾지 못할, 뻔하디 뻔하고, 지루한 반복질의가 되고 말 테지만,
올해도 복자씨 앞에 서서, 똑같은 사진을 찍으며, 나는 또다시 묻는다.
제 아무리 붉어봐야 이제 곧 날씨가 더 추워져 떨어지고 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또 저와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것인데, 그래서 저 빛은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제 아무리 아름답고 찬란한들 무의미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작년에 붉었던 이파리는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으니, 이 빛은 완전히 새 것이고, 처음 보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서,
일 년 중 이 짧은 시간 나는 잠깐 저 빛에 마음껏 취해 보아도 되는 것일까?
존재의 가벼움은, 혹은 무거움은 견딜 수 없이 비참한 것일까, 아니면 생생하고 진실된 것일까?
‘영원히 반복되는 것과 한 번 지나고 마는 것’,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이분법 안에서,
그렇다면 올해 찍은 복자씨의 사진은 작년에도 촬영한 것 같은 기시감을 자극하는 무거운 카르마일까, 생전 처음 보는 찰나를 새롭게 기록한 가벼운 복제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