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없는 여행기

내가 브런치에 여행기를 쓰는 방법

by 후안

버트런드 러셀의 에세이집 <인기 없는 에세이 (Unpopular Essays)>에서 가장 감탄스러운 부분은 역시나, 책의 제목이다. -서가의 빈자리,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바로 그 진공의 여백을 메꿔 넣기 위해 먹음직스러운 책을 사냥하러 다니는 이들에게 아주 가끔 찾아오는 행운의 순간이 그러하듯- 오래전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강렬한 충격에 휩싸였다. 수고스럽게 책을 뽑아내어 표지를 넘겨볼 필요도 없이, 그 상태 그대로 책등을 일독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독서를 마쳤다는, 어쩌면 이 책은 서명(書名)만으로도 그 소명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제목과는 정확히 반대로 애초에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제목을 달고 이 책은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당연히 그 충격이라는 것은 그 제목 아래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저자의 이름이 병기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만약에 그의 이름이 아니라 ‘브런치 작가 후안’이라거나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 봉태아빠’ 같은 저자명이라면 내가 받은 충격이 그 정도에까지 이르렀겠는가 말이다. 위대한 지성이 일필휘지 집필한, 서점 매대에 깔리는 순간 베스트셀러가 될 운명을 타고난 책의 제목이라니.


이제 그 책을 집안의 작은 서가로 옮겨온 나는, 그 앞을 지나는 길에 저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약 오르고 서러운 기분을 느껴야만 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남긴 많은 사진들에서 확인되는 그 트레이드마크에 가까운 특유의 표정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면서 말이다. 기다란 파이프 담배를 앙다문 입술 사이에 옆으로 삐딱하게 끼워 넣고 있는 그 익살스러운 표정, 세상의 수많은 이치에 통달하고 심지어 그 이치를 직접 그려내기까지 하는 고령의 천재는 그 표정 하나로 세상을 향해 ‘어쩔 건데?’라고 약을 올린다. 농담반 진담반의 (tongue in cheek) 장난기 어린 얼굴로.


그런데 러셀의 가슴속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겸양의 마음이나 혹은 조금 덜한 유머 감각이 있었다거나 하는 이유로 이 제목을 사용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면, 그리하여 그것을 써먹을 기회가 운 좋게도 나에게 먼저 주어졌더라면, 위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자, 내가 만약 여기에 기록해 놓은 글들을 그러모아 그 위에 표지를 얹고 <인기 없는 여행기>라고 제목을 붙였다 치자. 그것은 농담반 진담반이 아니라, 절반의 진담에 또 절반의 진담을 더한, 그리하여 오직 너무나 날카로운 유리 가시 같은 진실만을 정제해낸 것처럼, 입에 머금어두고 실토를 망설이기에는 입안이 따끔따끔 쓰라려 오는 -sting in cheek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하는- 솔직한 자기소개서가 되고 만다. 그래, 정말로 인기가 없어도 너무나 인기가 없어서 말이다.


이곳 브런치에서 제공하는 통계 기능이, 그야말로 순수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여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의 정신적 성숙에 기여하고 있는 바가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이 인기 없는 여행기를 읽는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매일매일 나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아마도 이 우주의 모든 허수를 걷어 모아놓은 곳이 조회수 통계 페이지라는 곳일 텐데, 글의 발행 버튼을 클릭한 손가락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야말로 타키온의 속도로 나타나 그곳에 전자(電子)적인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좋아요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한 줄 한 줄 즐기며 찬찬히) 읽는 이가 거의 없는 이 인기 없는 여행기를, 가련하게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들여다보며 글자 수를 보태어 오고 있다. 어떠한 글은 여행 중에 기록한 사진을 넘겨보다가 머리나 식힐 겸 새 페이지를 열기도 했고, 어떤 글은 상당한 사명감에 젖어 며칠을 뼈대를 고쳐 세우고 살을 더해가며 글쓰기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양심에 따라 그 어느 글 하나 빠짐없이 졸고임을 자인하는 바이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적어도 종이를 낭비하지 않는 방법을 택하였다는 점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비인기(非人氣)의 긍정적인 기능이 이 순간에 발현된다. ‘아무렴 뭐 어때’ 하는 홀가분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는 바, 이 글에 뭔 짓을 해도 무슨 상관이랴 하는 오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 낭비적인 글의 불필요성이란 것이 누군가 시간과 수고를 들여 일독한 후에나 발생하는 결과이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것처럼 이곳에 뭔 난장을 쳐도 세상에는 완전히 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단계를 종말론적 낙관주의라고 부르든 낙천적 종말론이라 부르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겐세이(牽制)라 부르든, 이 파멸적 정신상태를 설명할 용어가 필요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적절한 것을 하나 골라도 좋겠다.


그리하여 나는 위대한 작품들에서 알 만한 몇 줄을 훔쳐와 패러디나 오마주를 해보기도 하고, 오래된 팝송의 노랫말을 가져다 섞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서신을 띄워보기도 하고, 다른 시간의 두 가지 사건을 교차하여 배치하기도 하고, 역사의 공백에 소설적 상상력을 덧붙여 보거나 아니면 아예 소설을 써버리기도 하면서, 이곳에 이러저러한 다양한 글쓰기 방식을 실험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저 위대한 위키피디아라던가 자타가 전문가임을 공인하는 여행 블로거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친절한 정보 제공의 호혜를 베푸는 글에 도전하는 일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글은 교통수단이나 숙소 추천, 현지인들 사이에 유명한 숨은 맛집 소개와 같이 현장에서 써먹을 만한 정보라고는 단 한 줄도 찾아보기 힘든, 불친절하고 낭비적인 인터넷 아티클 아카이브에 몇 바이트 보태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래서 나는 겁내지 않고 경박한 나의 상상력의 범위 내에서 내가 해볼 수 있는 다양한 실험들을 해가며 여행기를 이어왔다. 대부분은 농담에 가까운 수준에 그쳤지만, 실제 내가 놓치지 않고자 했던 경향성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농담’에 가깝기를 바랐다는 것이니 자책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써보고자 하는 방식의 글쓰기도 하나의 작문의 기술로 허용이 가능한 것일까? 나는 사뭇 궁금해진다.

며칠 전부터 잠자리에 누운 내 머릿속에서 비듬처럼 띄엄띄엄 떨어져 내리던 파편적인 음운들, 꿈과 현실의 문을 들락날락거리며 탁한 먼지처럼 흩뿌려지는 낱말의 입자들, 나의 축축한 뇌막의 표면에 떨어져 내려 수면 위의 꽃가루처럼 이리저리 튕겨 날뛰며 브라운 운동하던 그 언어의 연쇄들은, 며칠이 지나도 도무지 합리적인 맥락이라고는 발견되지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개연성의 실로 꿰어내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고, 조금의 논리에도 기대지 아니한 채로 마구잡이로 풀어내어보는 시도를 해본다. 이곳은 이토록 세상을 향해 활짝 공개되어 있어도, 이토록 사적인 공간이므로, 나는 언어라는 고귀한 신전을 향해 그 어떤 부도덕한 실험을 일삼아도 무죄에 이를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 시도의 결과물은 아래의 여행기로 이어진다.

https://brunch.co.kr/@juanbien/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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