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시장을 지나는 배낭여행자의 단상

조지아 트빌리시, 드라이 브릿지 마켓에서 (上편)

by 후안

마구잡이로 쓰여진 (것처럼 보이는), 그 방법론적인 근본을 일말도 찾아내기 힘든, 이번 여행기에 대한 변명은 앞서 발행한 글로 갈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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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 - 벼룩시장]

루스타벨리 대로를 가로질러 트빌리시의 올드타운을 벗어나는 발걸음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듯하다가 또 한 번의 기착지를 만나 순항 속도를 늦춘다. 쿠라 강을 향하는 길에 드라이 브릿지를 건너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광경 앞에서 -특히 이방에서 온 여행자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추게 되는 것이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변 인도 위에 수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어 간판 하나 없이 바닥에 천을 깔거나 접이식 간이 테이블을 펼쳐 놓은 난전(亂廛)이자, 그 쓸모가 거의 남아있지 않거나 상당히 의심이 되는 골동품들을 팔고 있는 벼룩시장의 등장이다.

세계 어디를 가든 벼룩시장은 여행자라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당한 구미를 유발하는 장소가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여행지의 과거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민속박물관이자 저렴한 가격에 꽤나 희소성과 재미가 담긴 기념품도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은 여행자가 최후까지 집중력을 발휘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야 할 장소가 된다. 귀향 후에 시중 대형마트나 아마존 쇼핑 같은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을 섣불리 집어 들게 된다면, 괜한 호기심에 취해 기념품의 취지를 잃어버리고 남은 여정 동안 배낭의 무게와 자리만 더하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덫에 걸리고 마는 것이고, 제대로 실용성까지 갖춘 물건을 골라내고 그것을 적절히 흥정까지 하여 가져온 후 실제 가장집물(家藏什物)로 쓸모 있게 사용한다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실리를 높이 올리면서도 오랜 세월 후에도 여행지의 추억을 생생히 되살려 와유강산(臥遊江山) 하는 감상지학(鑑賞之學)의 뜻에 이르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건너온, 아직 여정이 한참 남아있는 배낭여행자에게 작동이 의심스러운 녹슨 키릴 문자 타자기가 아무리 멋있어 보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노어노문학을 전공하신다면 또 모르겠다만). 대신 백 년 전에 수공 제작되어 멋지게 에이징 된 휴대용 체스 풀세트가 이만 원 정도의 가격표를 붙이고 한구석에 놓여있다면 배낭 속 없던 여백도 만들어 내볼만하다.





[벼룩시장 - Flea market]

이러한 곳을 주로 벼룩시장, ‘플리 마켓(Flea market)’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기원은, 역시나 벼룩(flea)이 들끓을 만큼 오래 묵은 물건들을 내다 팔던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따라서 그 기원지의 기후적, 지리적 환경에 따라 ‘곰팡이(mold) 시장’이나 ‘녹(rust) 시장’으로 불렸더라도 그 유래를 수긍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토록 강력하게 지지되는, 사실상 정설에 가까운 설이 든든히 버티고 있다면, 거기에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작은 가설을 하나 더 보태는 것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이러나저러나 설(說)인 마당에.

그래서 나는 “언어가 생겨난 이후부터 아주 오랫동안 비밀리에 운영되어 오는 ‘FLEA’를 사고파는 시장이 있다.”라는 가설을 제시해 본다. Fish를 파는 곳이 Fish market이고, Flower를 파는 곳이 Flower market이라면, FLEA market은 FLEA를 팔아야 마땅하니까.




[Flea market - FLEA]

다만 이것은 글자 그대로 벼룩을 사고파는 시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FLEA가 거래되는 곳이다. 그렇다면 FLEA는 무엇인가. FLEA는 널리 알려진 네 글자 두음어(Four Letter Extended Acronym)를 말한다. 따라서 FLEA가 뭐냐는 질문에, FLEA는 일종의 FLEA라는 (FLEA is a FLEA), 재귀적인 설명 역시 가능하다.

각주 속에 각주를 더하자면, ‘Acronym(두문자어)’ 역시 낱말의 머리글자를 모아 만든 두문자어(頭文字語)로 역행적 해석을 붙이기도 하는데 즉, 이 단어에 ‘Abbreviated Coded Rendition Of Name Yielding Meaning (의미 산출형 명칭의 축약형 암호문 변환)’이라는 억지스러운 해석을 갖다 붙이는 집요한 자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영리하고 부지런한 억지꾼들을 좋아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요긴하게 쓰고 있는 영문으로 된 네 글자의 두문자어들에는, AIDS, ASAP, FIFA, NASA, NATO, SWAT, TGIF, WIFI, YMCA, YOLO 같은 말들이 있다. 그리고 최근 해외의 소셜 미디어의 댓글 등에서 자주 보게 되는 FTFY, FOMO, LMAO, NSFW, OOTD, ORLY, POTD, QOTD, ROFL 같은 말들도, 텍스트를 이용한 대화를 효율적이고 경쾌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신속하게 생산되고 폐기되면서 최신 트렌드에 대한 민감도를 측정해보는 리트머스로도 부가적인 기능을 한다.




[FLEA - CCCP]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면 이제 까마득히 멀어진 본론이자 이야기의 무대인 조지아의 트빌리시를 찾아 다시 뒤로 돌아가 보자.

지금 내가 도착한 이곳 벼룩시장은, 문자가 발명된 이래 수천 년간 암암리에 네 글자로 된 두문자어를 사고파는 시장들 가운데 캅카스 지방에서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며, 길드 수뇌부 중에서도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 몇 명을 빼고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다.

CIA, MI6 등의 정보기관이나 일루미나티, 장미십자회 같은 비밀스러운 집단이 첩보를 통해 거래 통로를 겨우 찾아내는 데 성공한 후, “아주 특별한 고강도 훈련을 비밀리에 치를 예정인데, 괜찮은 FLEA 하나만 파십시오.”하고 거액의 무기명 채권이 든 가방을 비밀스럽게 테이블 아래로 건네면, “흠, 어디 보자⋯⋯ 자, 여기 있소. S.H.I.T(Special High Intensity Training)이오.” 하면서 슬그머니 주머니에 쪽지를 찔러 넣어주는 식이다. (예시가 된 S.H.I.T은 내가 억지를 부리자고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실제 사용되는 용어임을 밝혀두겠다.)


전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머리숱이 적은 한 남자가 북쪽에서 캅카스 산맥을 넘어 이곳으로 숨어 들어온 후 “혁명국가의 이름에 어울릴 FLEA” 하나를 몰래 사갔다. 그 후 그는 혁명에 성공하였고 그가 받아 간 FLEA 또한 그의 생애 동안 꽤나 세상에 위세를 떨치게 되었지만, 채 백 년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진 글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쓸모가 없어진 그 FLEA는, 더이상 비밀스럽지도 않게 공공연한 가판에 깔려 헐값에 팔리고 있다. 이 시장의 난전 여기저기에서 그렇게 팔려나가고 있는 FLEA는 바로 ‘C.C.C.P’이다.




[C.C.C.P - U.S.S.R]

‘C.C.C.P: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이 키릴 문자의 FLEA가 퍼뜩 해독되지 않는다면, 영어로 옮긴 글자에 익숙해서일 수도 있다.

영어로는 USSR(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라 칭해지며, 우리말로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국가 연방체의 이름이다.




[USSR - 소비에트 연방 - 소연 - 소년 - 소련]

소련(蘇聯)은, 수많은 형태의 정치적 실험이 벌어졌던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본다면, 그다지 길지 못한 시간 동안 시끄러웠던 소연(小宴: 작은 잔치)에 불과했다. 근대 국가 시대의 역사 안에서 연대표를 그어 보아도 (당시의 유럽 남성 기대수명보다 짧은) 고작 68년 11개월 26일 동안 존재했던 정치 실험체라면, 역사 안에서는 세상에 태어나 채 머리가 여물지 못한 채로 숨을 거둔 소년(少年)의 나이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너무도 어린 나이의 사멸이라 상복 마저 입지 않는다는 무복지상(無服之殤)의 죽음, 그 작은 상여의 뒤를 소련(素輦: 임금이 상중(喪中)에 쓰던 흰 수레)에 앉아 뒤따르는 왕관을 쓴 자가 있다. 위대한 힘을 손에 넣은 제왕이 되어 이 죽음을 무효로 되돌리고자 하는, 저 소련이라 불렸던 소년을 되살려 내기를 갈망하며 이를 갈고 있는 머리숱이 적은 전직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요원이 저기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소련(蘇聯)의 음차에 쓰인 한자어 ‘蘇’는 ‘되살아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운 마음을 가득 새긴 무거운 비석을 망자의 무덤 위에 올려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꽉꽉 눌러 놓는 것처럼, 세상은 그 이름에 저 글자를 몰래 심어놓고 삼십 년 동안 그 부활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소련 - 마르크스]

소련이 기세등등했던 냉전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몇 가지 공산주의 유머를 기억할 것이다. 해외, 특히 미국에서 하나의 고전 장르가 될 만큼 인기를 끌었던 소비에트 유머는, 소련의 자리에 북한을 대치시킨 변용된 버전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졌지만 스토리 구조상 큰 어색함 없이 똑같은 재미를 주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컨템포러리한 부문이다.)


드라이 브릿지의 벼룩시장을 둘러보다가, 나는 그 유머들 가운데 하나가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다.

“In America, your job determines your marks. In Soviet, Marx determines your job.”

“미국에서는 당신의 직업이 당신의 수준(marks)을 결정한다. 소련에서는, 맑스(Marx)가 당신의 직업을 결정한다.”




[Marx - marks]

불현듯 그 조크가 떠오른 것은, 가판에 수두룩하게 깔린 반짝이는 예쁜 배지 핀들이 구 소련 시대의 마크들(marks)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러시아어에 까막눈인 처지이지만, 얼핏 보기만 해도 이것이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냉전 시대를 살아낸 사람이라면 붉은 별, 레닌과 스탈린, 낫과 망치, 공장 굴뚝 같은 것들이 새겨진 배지 마크를 보고 대충 알아챌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중에는 기념일을 맞아 찍혀 나온 것들이 상당수였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기념하는 배지들도 종목별로 많이 눈에 띄었다. 나중에 나는 구글 번역기의 힘을 빌려, 문자가 식별 가능한 몇 개를 번역하는 데 성공했다.

“콤소몰(전연방 레닌주의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위원회 우수 교육생 (ЦК ВЛКСМ ЗАОТЛИЧНУЮЮ УЧЕБУ)”, “소련 우편국 70주년 기념 (70 ЛЕТ СОВЕТСКОМ ФЕЛЬДЪЕГЕРСКОЙ СВЯЗИ)”, “공군의 날 기념 (ДЕНЬ ВОЗДУШНОГО ФЛОТА)”, “1986년 평화의 날 기념 (1986 ГОД МИРА)”.


나머지 상당수는 탑이나 성채, 맹수, 새, 나무, 꽃, 칼, 선박 같은 상징물들로 아주 다채롭게 꾸며져 있는데, 이들이 모두 각 지역의 특산물들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마크들은 그 마크를 달고 있는 자가 소속된 지역위원회를 표시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 지역위원회의 범위가 동쪽으로 시베리아부터, 서쪽의 우크라이나, 몰도바까지 거의 모든 구 소련의 지리적 범위를 포함하는 놀라운 컬렉션이다.

마가단(МАГАДАН, 러시아), 노보로시스크(Новоросси́йск, 러시아 그리 멀지 않은 흑해 연안) 세베로모르스크(Северомо́рск, 러시아, 외국인의 방문에 허가가 필요한 러시아의 많은 폐쇄도시 가운데 하나), 노보시비르스크(Новосибирск, 러시아 시베리아 연방), 오르헤이(ОРГЕЕВ, 몰도바), 피리아틴(ПИРЯТИН,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Харків, 우크라이나), 보고두키이(БОГОДУХО, 우크라이나),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 한때 우크라이나의 영토였으나 2014년 러시아의 연방시로 귀속)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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