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는 향수병에 걸리지 않는다

조지아 트빌리시, 드라이 브릿지 마켓에서 (下편)

by 후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셋으로 쪼개어 놓은 이 막되어 먹은 이야기의 갈피를 조금이라도 잡고자 하신다면 앞선 이야기들을 먼저 읽어주시길 바란다.


https://brunch.co.kr/@juanbien/46


https://brunch.co.kr/@juanbien/47




[marks - 흔적]

이제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기나 할지 의심스러워 보이는 축음기와 함께 많은 레코드 판들도 매물로 나와 있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범위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1988년 앨범 ‘Delicate Sound of Thunder’, 조 카커와 퀸의 히트곡 모음집, 1969년 발매된 레드 제플린의 2집, 그리고 1968년 발매된 비틀즈의 ‘White Album’ 같은 서구권의 음반들도 꽤 눈에 띈다.

구불구불 깊어진 주름을 영영 벗겨내지 못할 장갑처럼 끼고 있던 한 노인은, 문득 생각이 닿을 때마다 무심히 물건들을 하나씩 집어 들어 먼지를 털고 광이 나도록 문질러 닦아낸다. 지난날의 영광과 비극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조지아의 노인들이, 이제는 녹슬고 때가 묻어 어두워진 그날의 배지와 훈장들은 물론, 친구들과 몰래 즐겨 듣곤 했던 서방 세계의 음악까지 땅바닥에 내려놓고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 이 풍경 속에서, 나는 그 남자가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다.


쿠라 강을 건너 북쪽에서 하얀 수레 한 대가 도착하고, 거기서 머리숱이 적고 미간이 좁은 한 사내가 비밀스럽게 내린다. 플라스틱 접이 의자에 앉아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씹어 물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모자를 슬쩍 뒤로 끌어 넘겨 노여운 눈빛을 드러내고 그자를 노려보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에게 다가가 그 앞에 쪼그려 앉는다.

“동무. 이 지역위원회 마크들, 내가 좀 사가야겠소.”

노인이 고개를 돌려 바닥에 마른침을 퉤 뱉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이 많은 것들을 다 뭐에 쓰시게? 그쪽은, 어디 소속이셨소?”

“나요? 나는 여기 모두에 속했던 사람이오, 동무.”

노인은 잠시 사내와 눈싸움을 벌인 후, 가판을 접기 위해 허리를 숙인다.

“장사 끝났소. 당신한테는 안 팔아.”

미간이 좁은 사내는 얇은 입술 끝을 위로 끌어올려 억지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입고 있던 사냥용 점퍼 안주머니에서 마카로프 권총을 꺼내 노인의 챙 짧은 모자를 툭툭 친다.

“동무. 난 이것들을 모두 모으고 있는 중이란 말이오.”




[흔적 - 기념물]

당신의 비밀스러운 서랍에는 어떤 기억들이 담겨 있나. 아이에서 어른이 되면서 몇 차례 이사를 거치고 진학이나 입대나 취업의 사정으로 집을 떠나고 돌아오고 짐들을 옮기고 늘리고 줄이고 버리고 나눠주는 사이에,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고 서랍 속에 꾹꾹 눌러 담아둔, 그래서 아주 가끔 끄집어내어 먼지가 꺼끌거리는 추억의 손길로 매만져 보는 기념물은 어떤 것들인가.

또는, 그토록 소중히 아끼던 물건이었지만 결국 애정이 식고 당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당신의 손을 떠나버려 이제는 부재의 아쉬움마저도 남아있지 않는, 그런 망각물들은 또 어떤 것들인가. 동묘의 벼룩시장이나 신설동의 서울풍물시장, 제주의 넥슨컴퓨터박물관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마주치고는, 행복했던 그 시절로 순식간에 돌아가 멍하게 걸음을 멈추게 되는, 그리운 그 물건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을 다시 하나씩 모아 방안 가득 채우게 되면, 당신은 그 걱정 없이 좋았던 시절로, 당신의 벨 에포크(La Belle Epoque)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저기 노인의 관자놀이에 차가운 총구를 누르고 있는 전직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도, 죽은 소년을 되살려 그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사악한 호크룩스를 모으고 있는 것일까.

총구를 타고 노인의 온몸으로 서늘한 기운이 퍼져나가며 머리가 쭈뼛 서 있는 사이, 권총을 쥔 사내는 다른 손으로 지역위원회의 배지를 뒤적거려 몇 개를 골라낸다.

“여기에 있었군. 키예프⋯⋯ 하르코프⋯⋯.”

“키이우, 하르키우라고 말하시오!”

“동무⋯⋯ 미안하지만 그렇게 부를 일은 결코 없을 거요.”




[기념물 - 향수병(香水甁)]

오래된 물건들은 오래된 냄새를 가진다. 오래된 레코드판을 들출 때마다 시큼한 술냄새가 풍기고, 오래된 책들은 펼치는 갈피마다 먼지 냄새가 피어오르며, 오래된 식기나 장신구를 만진 손에는 쇠 냄새가 옮겨 묻는다.

그 냄새들은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나를 오래전 어느 날로 툭 던져놓는다. 오래전 알았던 냄새다. 할아버지의 은단을 몰래 맛보기 위해 조심조심 끌어당긴 문갑 서랍에서, 식은 밥을 꺼내기 위해 열었던 부엌 찬장에서, 겨울 점퍼를 찾기 위해 힘들게 잡아끈 좀약을 채워둔 옷장 서랍에서, 나는 이미 이 냄새를 배웠다.


묵은 냄새를 풍기며 과거를 되비치는 저 작은 금속 조각들은 산산이 깨어진 추억의 파편이다. 그 향기에 취해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너도나도 한 점씩 뜯어먹은 후에, 채 소화시키지 못하고 뱉어 낸 그 좋았던 시절의 뼛조각이다. 지금은 멸종한, 한때 세상을 지배했던 거대하고 강력한 짐승을 증거하는 반짝이는 화석들이다. 그저 코를 쓱 대기만 해도 당신을 그 행복했던 나날들로 데려다 줄 마법의 물약이 담긴 향수병이다.


“다들 그를 만지고 싶어, 그의 일부분이라도 갖고 싶어 안달이었다. 작은 깃털 하나, 날개 한 조각, 그 놀라운 불꽃을 두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옷이 찢어졌고 머리카락과 피부가 떨어져 나갔으며 몸뚱어리가 물어 뜯겼다. 사람들은 손톱과 발톱을 세우고 그의 육체에 달려들었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中에서





[향수병(香水甁) - 향수병(鄕愁病)]

전직 국가보안위원회 요원이었던 남자의 넓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손끝이 파르르 떨려온다. 남자의 호흡이 가빠지면서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고장난 기계의 소음처럼 혼자 있는 방안을 가득 채운다.

남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으로 다가가 자물쇠를 걸어 잠근 후 더듬더듬 서랍을 열어 술병을 꺼낸다. 술은 유리 가가린이 세계 최초로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했던 1961년에 제조된 보드카이다. 술병 속 보드카는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지만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아낌없이 잔에 쏟아붓는다.

찰랑이는 잔을 협탁에 올려둔 채,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의자를 밟고 올라가 벽의 높은 곳에 걸어둔 헌팅 트로피를 향해 손을 뻗는다. 직접 사냥하여 박제한 말코손바닥사슴의 머리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죽어있는 사슴 대가리의 왼쪽 뿔을 당기자 반대편의 난로 벽감이 스르륵 움직이며 큼지막한 비밀 금고가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는 금고 속에서 커다란 지도판을 끄집어내더니 오늘 트빌리시의 벼룩시장에서 챙겨 온 배지들을 하나씩 살펴 해당 지역을 찾아 꽂아 넣는다. 아직 빈칸이 제법 남아있지만 남자는 언젠가 지도의 모든 칸이 다시 채워질 날을 생각하면서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다.

보드카를 한 잔 훌쩍 들이켠 남자는 다시 금고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그 안에서 그가 조심조심 꺼내어 든 것은 오래된 레코드판이다. 그는 정전기로 들러붙는 내부 비닐 커버를 후후 불어 조심히 벌린 후 레코드판을 살짝 꼬집듯 끄집어내어 턴테이블에 넣는다. (누군가에게 이 부분을 영어로 번역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부디 ‘He PUT the disc IN the turntable’로 옮겨줄 것을 당부한다.)


턴테이블의 카트리지가 디스크에서 제대로 자리를 찾아 트랙에 놓이고 경쾌하게 활주를 시작하자 스피커에서 찢어질 듯한 비행기 이륙음이 흘러나오더니, 이내 쿵쿵짝짝거리는 락앤롤 리듬이 울려 퍼진다.

곡은 비틀즈의 1968년 발표곡 ‘Back in the U.S.S.R.’(소련으로 돌아왔어)이다. 취기가 돌고 음악이 고조되자 보드카를 홀짝이던 그는 흥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짧은 스텝을 밟으며 빙글빙글 춤을 춘다. 이제 완전히 제 컨디션을 회복했다.


“Well the Ukraine girls really knock me out

우크라이나 여자들은 정말 끝내주지

They leave the West behind

다른 서방 여자들은 다 잊어버릴 정도라니까

And Moscow girls make me sing and shout

모스크바 여자들은 날 노래하고 소리지르게 만들지

That Georgia's always on my mind

‘조지아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어’ 라고

- The Beatles, Back in the U.S.S.R.


그러다 갑자기 우뚝 춤을 멈추고 엉덩이를 뒤로 쭉 뺀다. 이윽고 얼굴이 한동안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더니, 푸드덕하는 소리가 엉덩이 쪽에서 울려 퍼지고 지독한 악취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속이 편안해진 남자는 낄낄낄 웃고 나서 크게 한마디를 외친다.

“Yeah, I’m Pootin’!” (그래, 나 방귀 뀌었다!)





[향수병 - 노스탤지어]

‘향수’라는 말 뒤에 자연스럽게 ‘병(病)’자가 붙는 것은, 그것이 분명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최초 자신들의 발상지를 떠나 그 기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로 결심했던, 호모 노마드(homo nomad)의 이름을 택하였던 시절부터 시작된 유전적 고질병이며 경계 바깥의 풍토병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 지구적, 전 인류적 증상은 고대 그리스어에도 그 진단서가 이미 기록되어 있다. 향수병을 말하는 라틴어 노스탤지어(nostalgia)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집으로 돌아가다’라는 뜻의 νόστος(nóstos)와 고통, 아픔을 뜻하는 ἄλγος(álgos)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노스탤지어 - homesick]

영어에서도 ‘-algia’는 고통을 뜻하는 접미사이다. 그래서 노스탤지어를 그대로 영어로 옮겼을 때에도 뒤에 ‘sickness’가 따라붙는다.

이것은 그저 그리운 그 장소, 그 시간을 말하고자 하는 낯간지러운 로맨틱한 은유가 아니다. 향수병은 분명한 질병이며 상사병과 마찬가지로 신체적으로 이상 징후들이 발현되고 다양한 통증과 합병증을 유발한다.


밀란 쿤데라는 향수병의 발병 원인이 무지(無知)라고 진단을 내렸다. 무지는 공포를 유발한다. 내가 없이도 그곳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고, 그것을 지금 내가 알지 못한다는 두려움. 그 공포심이 나를 존재론적 불안과 걱정에 휩싸이게 하고 내가 그곳에 있었던 시절, 내가 분명한 형체로 버티고 서있던 그날로 뒤돌아 걷게 만들며 나를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저 전직 KGB요원이 시달리고 있는 건강 이상 증세가 바로 그것이다. 조국의 영웅이 로켓에 몸을 싣고 지구 바깥으로 날아오르는 그 하늘을 엄숙히 올려다보던 아홉 살 꼬마의 시절로, 그 위대하고 장엄했던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번 엄마와 아빠의 품에 안겨 보고 싶은 것이다.


“우리 아들은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저는 조국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이 될 거예요!”

“어떤 사람일까, 그게?”

“대통령이요!”

“하하하, 우리 조국에는 대통령이 없단다. 거기다 그 자리는 아주 잠깐일 뿐이야.”

“하지만, 저는 반드시 대통령이 될 거예요. 그리고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면⋯⋯ 그러면, 유리 가가린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은 아버지는 남은 한 팔로 아들을 끌어당겨 품에 꼭 보듬어 주었다.


(이런 것까지 걱정해야 하나 싶지만, 당연히 허구의 기록이니 믿지 마시라. 실제로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과 치고받으며 싸우는 문제아였다고 한다. 방탕하게 놀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일지 모른다.)




[Homesick - Farsick]

우리의 몸은 특정 영양소가 과하게 부족할 때도, 그 반대로 심하게 넘칠 때도 질병에 걸린다.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걸리는 병이 있으니, 그 대척점으로 집에서 멀리 떠나지 못해 걸리는 병도 있을까? 있다면 그 질병의 이름은 무엇이어야 할까? Homesick과 반대로 Farsick이라고 부르면 옳지 않을까? 하지만 국어사전에도 영어사전에는 이런 말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Farsick - Fernweh]

다행히 독일어에는 이러한 언어적 공백을 메꿔 주는 친절한 단어가 하나 있다. 말 그대로 ‘멀다’는 뜻의 ‘fern’과 ‘아프다’는 뜻의 ‘weh’를 합친 말, ‘fernweh’라는 말이다. 우리말로는 ‘타향수병’이라고 마음대로 옮겨도 괜찮은지 (어디다가 허락을 구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Fernweh - 다시 트빌리시: 쿠라 강 너머]

그렇다면, “타향수병(他鄕愁病)이라는 것이 가능한 질병일까?”하는 질문에도 이제 답을 하자.

타향수병 역시 분명히 그 신체적인 징후를 드러내며 아직 제대로 된 예방주사도 처방약도 준비되지 않은 불치의 병이다. 여기 내가 그 임상 증거이며 병리학적 결과물이다.


쿠라 강을 건너간다. 저 강 건너 또 어떤 길이 펼쳐질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고, 그중 몇 명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우정 어린 친구가 될지, 이제 서서히 주려 오기 시작하는 배를 채워줄 맛있는 음식은 어떤 것들이 준비되어 있을지, 나는 단 한 톨의 각성제 없이도 너무나 가슴이 두근대고 호흡이 가빠지고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멀리 떠나온 곳들보다 아직 닿지 못해 여전히 멀리서 나를 괴롭히는 곳들이 더 많이 남았다. 쿠라 강을 건너며, 나는 지금 몹시 아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