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처음 와 보는 곳인데, 강릉을 거니는 내내 나는 기분 좋은 기시감에 걸음이 휘청휘청한다.
어쩌면 바다를 끼고 있던 내 삶의 중요한 몇 개의 사건들이 저 미친 파랑에 휩쓸려 조각조각 났다가,
이곳 경포대에 홀연히 난파된 채 나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벌써 아는 것 같고, 저 매끈한 카페 건물 터에 오래전 자라났던 옥수수를 이미 맛본 것 같다.
저 낡은 석판 처마의 끄트머리 아래에서 아슬아슬 소나기를 피하던 오후의 냄새가 선명해지고, 이제는 복개된 이 길 아래 숨은 실개천이 다시 살아나 귀 안을 힘차게 흘러간다.
이제야 나는 알겠다.
해변 산책로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들의 이름이 기억나고, 그중에는 잊혔거나 이미 죽은 자들도 내게 띄엄띄엄 눈인사를 건네어 온다.
안녕, 다들 잘 지내고 있었구나.
몇 년 전 난생처음으로 방문한 줄 알았던 양양의 낙산사도, 나의 오래된 사진첩에서 중학 시절 친구들의 모습과 함께 불쑥 등장한 적이 있었다.
죽도 해변을 오가는 길에 무심히 지나쳤던 7번 국도의 38선 휴게소에서도, 나는 그 거대한 표지석 앞에 서서 삼 년 간격으로 두 번이나 사진을 남긴 적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나이쯤 되면 이런 기시감도 이제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저 골목 어디 낡은 평상 위에, 내 오랜 친구가 잘 끓인 두부전골에 막걸리 한 주전자 받아 놓고 있다가, 이 새끼 왜 이렇게 늦었어 하고 대뜸 마중을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다.
초록 페인트가 허물 벗겨진 철문을 슬그머니 열고 들어서서, 나 여기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다고 아무나 불러내어도, 나는 결코 미친 사람일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