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를 닦는다

by 후안

획 사이사이 짠물을 닦아 내어 바싹 말려 두겠다는 각오는, 그저 허울 좋게 떠벌려 놓은 메타포가 아니다.

말 그대로 글쇠 사이사이 기름기와 짠 기운을 씻어내는 수고를—이 기계식 키보드를 손에 넣은 이후로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꼬박꼬박—나는 자처해 오고 있다.


키보드에서 알알이 뽑아낸 글쇠를 중성세제로 조심스레 세척한 후에, 마른 수건으로 닦고 면봉으로 틈새 물기를 찍어 내어 완전히 건조한 다음, 그것을 다시 일일이 제자리에 찾아 꽂는다.

두 개의 키보드에서 쏟아져 나온 글쇠가 무려 174개나 되고 보니 무척이나 고단하고 지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가장 큰 어려움은 그 과정을 모두 마친 후에야 찾아오는데, 이 노고가 딱히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는 것을 매번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낡은 기타에서 녹슨 줄을 끊어 내고 새 줄을 갈아 끼우는 것처럼 극적으로 체감되는 변화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 미미한 효력을 손끝으로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다면, 나는 아마 청진기 하나만 들고 남의 집 담을 뛰어넘는 위대한 금고털이범 정도는 되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총구의 먼지를 털어내는 준비 태세라던가, 하다못해 먼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의 타이어를 사전 점검하는 정도의 행위와도 비할 바가 되지 않는, 이것은 무용하고 비생산적인 소요에 불과하다.

그저 글쇠 아래 쌓여 있는 약간의 먼지와 각질 부스러기, 언젠가 부주의하게 집어 먹었을 과자의 잔해, 집안의 공기 어디나 존재하는 고양이의 노란 털 몇 가닥을, 아주 잠깐 후후 불어 털어내 버리면 그 뿐, 진득하게 눌어붙은 일말의 회환 같은 것도 그 자리에는 없다.

기계식 키보드의 작동 원리와 관리 방법에 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없으니, 도구와 형식에 관한 그럴싸한 철학이랄 것도 나는 애초에 가져본 적이 없는 처지다.

그래도 나는 매년 이 소용없는 짓을 또 벌이고야 만다.

그러지 않고서는 또다시 일을 저지를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몽매한 미신의 영역이다.

고행의 길로 오체투지하는 선량한 제의다.

거듭 시작될 운문적 낭비를 미리 속죄하는 짧은 세례식이다.

다시 말해, 그렇다, 이것은 물 낭비에 불과하다.


지난겨울을 지나는 동안 나는 이 키보드들을 번갈아가며 매일 같이 괴롭혔다.

손가락 마디마디 피로가 밀려올 때마다 키보드를 교체해 가며 새로운 리듬을 되찾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다음 해 새봄이 찾아올 때까지, 거대한 공백 위에 22만 자의 글자를 눌러 담았다.

돌이켜 보면, 그 겨울의 시작에도 나는—씨앗을 심기 전 한 알 한 알 정성스레 손질하는 간절한 농심을 흉내 내며—글의 씨앗을 모조리 뽑아 반들반들 닦아내는 씻김굿부터 미리 한 판 벌여야만 했다.


보라, 계절이 되돌아온다.

대기 중의 물기가, 두개 속의 열기가 다시 식는다.

깨끗하게 세척된 두벌식 글자판이 열 손가락 아래 놓인다.

다행히 바삭하게 잘 건조된 또 다른 30만 자가 나에게는 준비되어 있다.

다만 그만큼 더 크게만 보이는 공백이 나는 자꾸 두려워서.

그저 글쇠나 닦는 일로 헛되이 또 하루를 보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