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앓느니 쓰지 Jul 11. 2018

prologue. 앓느니 쓰지

'나'는 몰라도 내 '몸'은 아나보다

*2017년 6월 6일 부터 2018년 6월 18일까지 377일 동안 총 28개국 115개 도시 세계일주를 다녀 왔습니다.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아내의 브런치(brunch.co.kr/@somangkim) 기생하다가 방금 막 독립했습니다. 이 곳에 여행 이후의 삶을 기록합니다. 뜨끈뜨끈 합니다.


한국말은 재미있다. 며칠동안 새 필명을 고민하다 '앓느니 쓰지' 라는 말을 생각해봤다. 쉽게 눈치챌 수 있듯 이 문장은 '앓느니 죽지'라는 한국어 특유의 자조적 표현에서 온 것이다. 사실 일전에 썼던 글에서 '앓느니 살지' 라는 표현을 써 봤었는데 웬지 이 표현이 꽤 맘에 들었던거다. 별거 아닌데, 다른 사람보기에 그렇게 신박하거나 무릎을 탁치게 만드는 표현은 아닌데 그냥 써보고 혼자 좋아서 변용놀이를 하다가 필명까지 만들어 보게 됐다.


'앓다' 라는 말은 가지고 놀기 좋은 용언이다. 유사어로는 '아프다' 정도겠지만 '아프다'는 자동사고 앓다는 타동사다(영어식 문법으로 봤을 때). 'OO을 앓다' 와 같이 어떤 목적어가 생략 돼 있는 것 같은데 목적어가 없어도 그렇게 틀린 표현이라 보기 어렵다. 또 앓다는 말 앞에 어떤 질병명이 와야한다면 육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가령 '폐렴을 앓다' 라든지 '대장염을 앓다' 같은 표현은 틀렸다고 볼수는 없지만 뭔가 어색하다. 말의 맛이 없는 느낌. 그보다는 오히려 '사랑의 열병을 앓다' '상사병을 앓다'와 같이 정서적인 증후와 관련된 -비록 의학적인 질병이 아니더라도- 아픔에 '앓다' 라는 용언이 상대적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쓰지' 라는 말은 또 어떠한가. 처음엔 순수하게 '글이나 문장 따위를 쓰다' 라는 표현으로 '앓느니 무언가를 쓰겠다'는 의지를 담으려는 필명이었다. 그런데 필명을 정하고 보니 쓰다라는 동사 앞에 한국어는 목적어에 따라 의미를 다양하게 변용할 수 있다는걸 알았다.

.

앓느니 글을 쓰지

앓느니 휴가를 쓰지

앓느니 돈을 쓰지

앓느니 인상을 쓰지

...

..

.

그렇게 말장난을 하다 보니 우리 인생에 앓아버리기 보다 쓸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생각을 했다. 긍정적 표현, 희망적 표현으로 애둘러 삶을 어설프게 위로하는걸 개인적으로 썩 즐겨하지는 않으나 말장난 안에서 나름 의미같은걸 찾는 놀이가 이 새벽 내게 작은 구원이 되었다. 아니 그냥 의미강박증 환자일지도...

브런치에는 멋진 사진이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도 있음_몬테네그로_코토르의밤


세계일주가 끝나고 3주가 지난 이 시점에 나는 앓고 있다. 우리가 여행한 115개의 도시들 중 그 어떤 곳보다 심각한 공기 질을 갖고 있는 이 서울이 비염의 가장 큰 원인인거 같다. 원체 계절이 지날 때 예외없이 코를 훌쩍이는게 습관이었는데 이번 비염은 유독 심하다. 마치 비염이라는 악독 사채업자가 지난 1년을 무사히 지낸 댓가에 대한 이자를 톡톡히 받아내려는 듯이... 이 새벽에 콜록 대다가 잠에서 깨 여행 후 첫 브런치를 써 내려갈 정도로... 골골 댄다. 그래도 쓰다 지우던 글이 술술 써내려가 지는걸 보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건가. 결핍이 창작활동에 원동력이었다는 예술가들의 말에 나도 숟가락 하나 얹어 보나. 개가 풀을 뜯어먹지. 냠냠


비염은 증상이고 원인은 상실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의 상실. 여행이 끝나서 어떠냐는 지인들의 질문에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고 다녔는데 나는 몰라도 내 '몸'은 아나보다. 경험이 없어 잘은 모르겠는데 만약 내가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진다면 난 어디 쳐박혀 질질 짜기보단 한 사흘 정도 독감을 심하게 앓을 것 같다. 상실한 것에 대해 감정보단 육체가 반응하는게 익숙한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 당분간 여행할 수 없다는 그 상실감에 대해 무덤덤하다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던거다. 맘이 아프든 몸이 아프든 아파야 그 상실감에서 자유로워 진다. 툭툭. 1년을 그러고 싸돌아 다녔으니 아파도 싸지.


앓느니 쓰지. 뭐라도 썼으니 됐다.


예쁜 것은 다 너를 닮았다(책광고 아님)


집순이(아내) 인스타 @k.mang
않느니 쓰지(남편) 인스타 @changyeonli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