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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느니 쓰지 Oct 03. 2018

EP9. 그랜드캐년에서 렌트카 사고난 썰

스압의 압박을 이기고 이 글을 끝까지 읽는 자 복이 있으리라

글이 매우 깁니다. 콤팩트하게 쓰는게 모든 글의 미덕임을 알고 있지마는 사건의 스케일상 짧게 표현하는 법을 도무지 모르겠어서 긴 글을 편집하지 않고 올립니다. 바쁘신 분들은 그냥 스킵하셔도 좋사오나 이 글을 꼭 읽으셨으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미국 여행 특히 그랜드캐년 여행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

2)미국이 아니더라도 여행 중 렌트카를 이용할 계획이 있으신 분들


이런 분들은 길고 루즈한 글일지라도 한 번 읽어 놓으시면 분명 피가되고 살이될거라 자부합니다.

혹시 일이 바쁘시다면 마지막 두 단락이라도 읽으시길 권합니다.

그럼 4개월 전 저를 지옥의 문까지 이끌었던 '그랜드캐년에서 렌트카 사고난 썰'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0.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작가들은 비극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작품 전반부에 주인공이 행복한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 날 유난히도 좋았던 우리의 운수는 다 처참한 엔딩을 위해서였구나 하고 나중에야 깨달았다. 몇 개의 자잘한 운수를 제외하고 행운은 크게 세가지였다. 1)지인을 통해 프로모션 코드를 얻어 렌트카를 시중가의 50%로 예약했다 2)에어비앤비를 통해 캠핑장비가 없어도 캠핑이 가능한 저렴한 숙소를 찾아냈다 3)프리우스를 예약한 우리에게 렌트카 직원은 웃으며 닛산 맥시마로 업그레이드 해 주었다. 여행한지 300일이 넘었던 시점이었다. 약간의 자신감을 '오만함'이라고 지적하는 자를 비웃어도 될만한 짬밥이었다. 라스베가스에서 그랜드캐년으로 떠나는 고속도로위에서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훗 내 세계일주 짬밥이 얼만데...'


1. 그냥 서울에서 부산 갔다가 대전으로 돌아오는거야

모든 것이 딱딱 들어 맞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불안요소는 있었다. 그것은 조금 빡빡한 우리의 일정이었다. 그랜드캐년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크다.  Canyon이라는 말 자체가 '깊은 협곡'을 말하는데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3개의 주를 끼고 있을 정도로 그랜드 캐년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자동차로 그랜드캐년을 여행하다보면 차에 내장된 시계가 갑자기 1시간씩 뛰어넘는 경험을 한다. 이는 네바다와 유타의 시차가 있기 때문인데 같은 고속도로인데도 주가 바뀌면 자동으로 차 시간이 한시간씩 널뛰기 하는 재미있는 경험을 할 정도로 그랜드캐년의 넓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랜드캐년을 '제대로' 여행하려면 적어도 1주일은 걸린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돈이 없었기에 일정을 압축하고 압축해서 사우스림만 1박2일 코스로 도는 강수를 뒀다. 오전 10시에 차를 빌려서 라스베가스에서 홀스슈밴드를 찍고(440km) 근처에 앤탤롭캐년으로 이동했다가 사우스림 바로 밑으로 이동하여(220km) 캠핑을 하는게 첫날의 일정이었다. 660km, 7시간 30분 정도 운전할 거리였다. 그 정도면 할 만 하다고 판단했다. '서울 부산이 400km니까 서울에서 부산갔다가 대전쯤 돌아온다고 생각하지 뭐' 하고 쉽게 생각했다. 물론 아내는 면허가 없으니까 운전은 나만.

이 정도면 미친듯이 달릴만 합니다만..._홀스슈밴드
앤탤로프 캐년에서 까꿍
사우스림. 그랜드캐년은 크게 웨스트림, 사우스림, 이스트림 등으로 구분된다.



2. 개와 늑대의 시간

사고는 앤탤로프 캐년에서 캠핑장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일어났다. 애리조나 그 황량한 사막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우리에게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는게 좋을거야. 길이 비포장이거든' 하고 충고인듯 협박인듯한 말을 했다. 앤탤로프 캐년 투어가 끝난게 대략 5시 반. 밟으면 해지기 전에 도착할 거란 기대감에 나는 주행모드를 '안전모드'에서 '레이싱모드'로 전환했다.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미친듯이 달리다가 급커브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해 가드레일에 쾅! 하고 박았다면 지금 나는 이 글도 쓰지 못하겠지. 사고는 그렇게 뻔한 드라마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늘 의외의 장소에서 일어난다. 구글맵스는 언제나 '가장 빠른 길' 안내한다. 그 길이 포장이든 비포장이든. 이제 막 태양이 능선에 걸려 저 멀리서 오는게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안가는 저녁 7시 즈음 애리조나 사막의 비포장을 급한 마음으로 달리는 장면이 상상되는가? 미드의 한 장면처럼 역광의 태양은 내 눈을 찌르고 거친 모래바람이 불어온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시야가 하나도 확보가 안되는 그 때 갑자기 만나는 황소떼들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미친 그건 진짜 영화였다. 위험하고 마음이 급한 것만 빼면 나쁘지 않은 광경이었다. 아니 굉장히 멋있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늘 아름다운 장면 뒤에 항상 뭔가가 있다. 이게 바로 클래식 클리셰. 주인공 초반 고통받고.....


"여기서 우회전" 비극의 트리거임을 알지도 못한 체 아내는 그 말을 내 뱉었다.


3. 보험인듯 보험아닌 보험같은 너어

비포장도로의 비포장도로 같은 길로 가라고 아내가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구글이 안내했고 아내는 받아서 전달했다. "여기는 아닌거 같은데..." 하고 생각하며 비포장의 비포장으로 들어선 순간 차가 출~렁 "빠각!"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불안한 마음에 얼른 차를 후진해 나왔다. 알고보니 그 길은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길이었다. 너무 어두워서 차가 얼마나 상했는지 바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순간 불안했지만 닛산의 힘을 믿었다. 아무렴 일본사람들이 만드는 차가 그 정도 충격으로 어떻게 될까 싶었다. 어쨌든 차는 굴러가니까 조금 더 조심해서 차를 몰았고 비록 해가 떨어진 후였지만 별다른 사고 없이 캠핑장에 도착했다. 다음날 날이 밝고 다시한번 차 밑 쪽을 살폈으나 별다른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다. 역시 별거 아니군 하고 라스베가스로 다시 7시간을 운전해 돌아와 차를 반납했다. 그런데 라스베가스 시내에 도착해서 엑셀을 밟을때마다 RPM이 미친듯이 올라가고 차에서 약간 셱셱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게름칙했다. 그러나 뭔 일 있겠어? 하고 일단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렌트카 담당자로부터 온 메일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어제 영업종료 후 반납한 렌트카 키 잘 받았어. 그런데 너희 차에서 오일이 좀 새는거 같은데? 혹시 사무실로 방문할 수 있겠니?" 역시 그 때 그 비포장의 비포장도로에서 뭔가 문제가 있긴 했었나 보군. 처음에 나는 찝찝하긴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인간은 '보험'이라는 좋은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인이 알려준 프로모션 코드의 가장 좋은 점은 그렇게 싼 가격에 보험이 포함이라는 것이었다. 역시 보험을 들어놓길 잘했어. 처음으로 보험의 혜택을 받겠군... 하는 생각으로 얼마나 커버될까 검색하다가 나는 보지 말아야 할 문장을 본 사람처럼 순간 오싹해졌다.


"차량이 비포장도로를 달릴 경우 보험 적용이 제외됩니다"


보험 약관 12페이지 정도에 아주 깨알같은 글씨로 위와 같이 적혀있었다. 뭐라고? 보험을 들었으나 적용이 안되는 보험이라니? 그런걸 보험이라고 할 수 있나? 뭐지? 이런 생 날강도 같은 놈들을 보았나.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늘 보험쟁이와 도박쟁이를 멀리하라고 가르치셨다. 비싸게 받아먹고 막쌍 쓰려고 하면 얼굴 싹 바꾸는 놈들. 대체 난 얼마를 물어야 하는 걸까? 나는 검색을 계속했다.


4. 자동차에 대해 다같이 공부해 봅시다.

자동차 왼쪽 앞바퀴 옆에 보면 '오일팬' 이라는 부품이 있다. 일종의 작은 통인데 이 통에 담긴 엔진오일이 기어변속이 부드럽게 잘 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도 작은 차들이 잘못해서 비포장으로 들어갔다가 오일팬이 손상되서 누유가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오일팬 부품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다. 검색해보니 부품은 비싸봐야 5만원이면 사는거 같은데 렌트카가 사고날 시 골치아픈건 정비사 인건비, 리프팅 비용, 휴차비용 이런 것들이다. 특히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미국의 인건비는 상상초월이다. '아씨 보험도 안되는데 세계일주 막판에 완전 X 됐구만...' 하고 후회의 한숨을 쉬다가 또 한번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글을 보아 버렸다.



뭐어???????????????????? 1200만원??????????????????????????????????????


앞서 말했듯 오일팬 자체의 가격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오일팬으로 인해 기어에 문제가 발생하면 최악의 경우 기어를 교체해야 한다.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차에서 가장 비싼 것이 엔진이고 그 다음이 기어인 것을 알고 있다. 오일팬이 손상된 채 700km를 달린게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불안이 조금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차를 반납할 때 들었던 셱셱 소리가 영 게름칙했다. 고작 웅덩이에 잠깐 빠졌다가 나왔다는 이유로 기어를 교체한다고? 이게 말이 되나? 그런데 싸구려 드라마들 보면 말도 안되는 우연으로 재벌2세가 평범한 여자랑 연애도 하고, 머리가 벽에 부딛혀 기억상실에 걸리기도 하지 않나. 아마 그 날 내 모든 여행은 다 끝났던 것 같다. 진정한 현실 공포는 시체나 귀신을 보는게 아니다. 하루 아침에 수업료로 1200만원을 날릴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애끼고 애끼고 애껴서 우리가 예상한 세계일주 비용에서 300만원 정도 남겼는데 그 4배에 가까운 돈을 나는 준비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저 일이 쿠웨이트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그보다 더 물가가 비싼 미국은 대체 얼마짜리 고지서를 나한테 보낼것인가. 그 날 숙소의 분위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라스베가스 근교의 허름한 여관방. 꿉꿉한 냄새와 어두운 조명 더블 침대위에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모으고 앉아 나는 강제노역을 사는 20년의 인생을 상상했다. 지하 탄광에서 하루 18시간을 일하며 모은 돈으로 주말에 맥주를 사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 카이지가 내 눈에서 왔다갔다 했다.


아...아.......Aㅏ..................._이미지 출처 : 구글


5. Accident Report 그 차가운 단어

모든 최악의 경우의 수를 상상하며 렌트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직원은 pave road에 갔었냐고 나한테 따져 물었다. 나는 순간 '아니!' 라고 답하려다가 '거짓말하면 가중처벌을 받는다'는 문구를 약관 어디서 본 것도 같아 이내 그만 두었다. "가기는 갔어. 그런데 우리는 GPS가 시키는대로 갔을 뿐이야. 제발 믿어줘" 읍소를 넘어 거의 울상에 가까운 얼굴로 렌트카 직원의 눈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사무적인 말투로 "가지 말았어야지" 하고 액시던트 리포트 서식을 내게 내밀 뿐이었다. 반성문을 적듯 액시던트 리포트를 적어 내려갔다. 차라리 반성문이었다면 장황하게 소설을 쓰고 선생님한테 10대 맞고 일주일동안 화장실 청소하고 끝났을 텐데 현실의 반성문은 그저 내 실수를 인정하고 그에 따른 처벌을 받을 시발점일 뿐이다. 이제 이 리포트는 내 앞에 냉혈한 담당자를 지나 매니저에게로 보고되고 사고처리위원회를 거쳐 싸늘한 이메일로 내게 돌아오겠지. "Dear LIM Unfortunately....."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최후통첩으로 내게 되돌아오겠지.


6. 해피엔딩? 열린결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계속됐다. 미국을 지나 호주와 태국으로. 내 죄의 댓가를 담은 이메일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게 더 불안했다. 일단 뭐라도 와야 투잡을 하든 쓰리잡을 하든 무릎꿇은 사진을 찍어 이메일로 보내든 할텐데 당췌 무소식이었다. 애가 닳은 나는 용기를 내어 먼저 메일을 보냈다. 렌트카 사무실 담당자에게 두세번, 한국지사 커스토머 서비스 담당직원에게도 한 번 메일을 보냈으나 보낼때마다 그들로부터 오는 답변은 동일했다. 현재 조사 중이고 조사가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그렇게 연락을 기다린지 벌써 4개월이 지났다. 4개월 정도면 그냥 내가 내야할 돈이 없다고 봐야하는 것일까? 혹시라도 담당자의 누락으로 청구하지 않다가 그 실수가 발견되어 나중에라도 청구서가 날라오는건 아닐까? 얼만큼 지나고 연락이 닿아야 공소시효는 만료되는 것인지. 사고 직후만큼은 아니지만 요즘도 가끔 불현듯 이 사건이 떠올라 잠에서 깨곤 한다. 그냥 지나간 것이겠지? 좋게 생각해도 되는거겠지? 불안하여 먼저 메일을 보내고도 싶어지지만 그런 어리석은 긁어부스럼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프로모션 코드를 소개해준 지인한테 이 상황을 얘기하니 "경미한 사건의 경우 가끔 외국인을 대상으로는 청구하지 않기도 하더라" 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준다. 그런거겠지. 경미한거겠지. 닛산을 믿는다. 치밀하게 자동차를 만드는 근면한 일본인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아메리카인들 특유의 자비로운 여유도 떠 올려본다. 왜 노래도 있지 않은가. 아메리카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아 좋아 좋아 케잌사주고~


Epilogue

혹시 제가 겪은 렌트카 사고가 드라마틱하지 않아 실망스러우신가요? 몸이 다치지 않았고 파손된 상대 차량이 있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큰 사고가 아니라고 하실 분들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으로 타인의 골절보다 내가 칼에 살짝 빈게 훨씬 아프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인류는 실패의 시체 더미 위에서 한 걸음 진일보하는 법이다" 라고 누가 그러더군요(제가 방금 지어낸 말입니다). 저는 실수했고 실패했지만 제 실수를 본보기 삼아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 한분이라도 렌트카의 위험성을 깨달으시라고 용기를 내 글을 써 보았습니다. 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신 인내심 있는 분들이 렌트하실 때 아래의 두가지 사항만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렌트카로 절대 비포장도로 달리지 마세요.

2. 이상하다 싶으시면 바로 경찰을 불러 폴리스 리포트를 받으세요.


스압의 압박을 이기시고 여기까지 읽으신 모든 분들께 보험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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