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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환Juancho Dec 28. 2018

SBS <더 팬>에게 하고 싶은 말

힘을 빼야 힘이 생긴다


책을 읽다 인상 깊어 메모한 구절이 있다. 소설가 김영하가 한 말이다.


Q: 그렇게 세계와 인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위치에 있다는 게 소설가로서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인가요?
A: 아니에요. 저는 작가로서 전지전능하지는 않아요. 그들을 컨트롤할 수도 없고요. 그 인물들은 스스로 움직이는데, 저는 단지 그 움직임이 시작되도록 스위치를 올리는 셈이에요. 그런데 그걸 저만 할 수 있어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 일종의 문지기예요.

Q: 추구하는 소설의 방향 같은 게 있나요?
A: 『위대한 개츠비』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선인인지 악인인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웃긴 인물인지 불쌍한 인물인지 파악하기 힘들어요. 분명히 알 수 없는 윤리적 판단의 회색지대에 있는 인물들이죠. 밀란 쿤데라가 한 멋진 말이 있어요.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다”.


지금 보니 더욱 매력적. 소설은 일기와 다르다. 독자가 필요하다. 그들이 책에 빠지게 유혹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이 독자들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주인공이 참 별로라거나 알고 보니 이런 메타포가 숨겨져 있었다는 둥 알아서 물고 뜯고 맛보고 씹을 자유를 주는 것이다. 이때 작가는 뒤로 빠져야 한다. 누가 멋있네 이게 옳네 이러쿵저러쿵 하면 독자가 다른 생각을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영하의 소설은 판단하지 않는다. 대부분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를 그저 던지기만 한다. 그래서 김영하의 소설은 재밌다.


하지만 이 작업은 정말 어렵다. 모든 창작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건 어쨌거나 뭔가 얘기하려고 시작된 이야기니까. 나도 작문 쓸 때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이 문장에선 다들 웃었으면 좋겠다’, ‘글의 핵심이니 여기는 꼭 강조해야지’라는 마음에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본다. 음, 훌륭하군. 만족하며 노트북을 덮는다. 하지만 나중에 스터디에서 함께 보면 정말...  후지다. 힘이 잔뜩 들어가서 그렇다. 슬픔을 표현하고 싶다고 글에서 잔뜩 울어 봐야 읽는 사람은 머쓱할 뿐이다. 아, 이런 아이러니.


힘을 잔뜩 주면 힘이 빠진다. 되려 힘을 빼면 힘이 생긴다. 이 현상을 나는 힘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이번 글은 힘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SBS <더 팬> 이야기다.




출처: SBS


<더 팬>은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다. 미국 팝 스타 어셔(Usher)가 12살의 저스틴 비버를 발굴한 것처럼, 스타가 자신이 먼저 알아본 예비스타를 국민들에게 추천한다는 콘셉트. 박정현이나 윤도현 같은 유명인이 우연히 보고 반했다며 무명 뮤지션을 추천하는 식이다. 포맷은 경연이다. 추천을 받은 15명이 각자의 무대를 꾸미고, 1등으로 뽑힌 출연자가 우승한다.


출처: SBS


제작진은 <더 팬>의 차별점으로 두 가지를 내세운다. 하나는 추천 제도. 스타가 자신이 발견해낸 '원석'을 알리고 싶어 하는 모습을 담는다. 더불어 긴장하는 모습까지. 이들이 추천한 예비스타를 패널들이 유추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팬덤 심사다. 기존 경연 프로그램의 평가 기준이 실력이었다면, 여기서는 ‘매력’이다. '지금 저기에 있는 참가자의 팬이 되고 싶냐'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4명의 심사위원이 있지만 이들도 한 표를 행사할 뿐 절대적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패널의 정식 명칭도 심사위원 대신 ‘팬마스터’다. 결과는 오직 관객 300명의 투표로 결정된다.


두 가지 차별점은 확실히 프로그램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너무 힘을 줬다.


하나) 정말 좋은 추천도 5분 넘게 들으면...


제작진은 추천인을 스튜디오로 데려온다. 평가단 앞에 앉혀 놓고는 왜 추천했는지를 묻는다. 이유라는 게 아주 사소할 때도 있고, 어떤 에피소드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다. 추천인을 스튜디오까지 데려왔는데 (그것도 셀럽을!) 들러리 세울 순 없으니까 인터뷰는 길어진다. 추천인의 스튜디오 섭외, 이게 문제다.


윤미래도 무한 반복으로 듣는다는데 이 노래가 별로라면 내 귀가 문제인 듯 (출처: SBS)


추천이라는 게 그렇다. ‘이 사람 매력적이야’라는 얘기를 처음 들으면 귀가 쫑긋하지만, 계속 들으면 괴로워지기 마련이다. 경연 프로의 핵심은 결국 무대다. 공연은 고작 3분인데 사전 인터뷰가 그보다 길다면 시청자는 지친다. 그냥 무대를 보여주는 게 빠르다. 하나 더, 추천인은 경연을 제대로 평가하기 힘들게 한다. 좋은 마음으로 스튜디오까지 나온 추천자 앞에서, 팬마스터가 어떻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진심보다는 눈치성 멘트가 먼저 나온다. 좀처럼 즐길 수가 없다.


둘) 여러분! 이 친구 진짜 대단하지 않아요?!


과잉 코멘트도 문제다. 무대가 끝나면 팬마스터가 감상을 나눈다. 어디가 매력적이네, 춤을 잘 추네 팬마스터끼리 토크를 한다. 심사평이 아니라지만 결국 <슈퍼스타K>나 <K팝스타>에서 숱하게 본 장면이다. <K팝스타>에선 각 회사 수장들이 참가자를 스카우트한다. 그래서 심사평이 필요하고 실제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더 팬>은 ‘각자 취향에 맞는 팬이 되고 싶은지’를 투표하는 곳이다. 몇몇 패널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버리면 ‘팬덤 심사’라는 차별점이 무색해진다.


심사위원인듯 심사위원 아닌 심사위원 같은 보아 (출처: SBS)


그 양도 너무 길다. <더 팬>은 회당 약 1시간 40분이다. 회당 4명 정도의 참가자가 나오니까 한 명당 분량은 20분 내외. 그중 무대는 3분, 추천 인터뷰 5분이니까... 나머지 15분이 팬마스터 리액션으로 채워지는 셈이다. 예비스타의 무대를 보고 팬이 되는 건지, 코멘트에 이끌려 팬 버튼을 누르게 되는 건지... 기획의도가 무색하다. 덧붙여, 감상평은 대부분 칭찬이다. (앞에서 말한 ‘추천인 섭외’의 영향이다.) 시청자와 관객이 느끼기도 전에 팬마스터가 ‘팬이에요’를 남발한다. 보는 사람은 머쓱하다.


힘을 빼야 힘이 생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잘 될까. 어떻게 하면 더 재밌어질까. 나라면 이렇게 바꾸고 싶다.


1. 경연자 수를 2배로 늘린다. 15명에서 30명으로. 1인당 러닝 타임은 줄이고 경연자 수는 늘려 팬의 선택지를 넓힌다. 경연자 수준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1인당 무대 수를 한 개에서 두 개로 늘린다. 미니 공연식으로 꾸미게 하는 것이다. 핵심은 무대 비중 늘리기다.


2. 추천자의 코멘트 기회를 제한한다. 지금처럼 늘어지는 인터뷰는 안된다. 딱 30초 제한 시간을 두고 PR하게 만들면 좋겠다. 텐션도 올라가고, 재미도 생기고. 한참 버벅거리는 추천인, 세월아 네월아 딴소리하는 추천인, 중간에 짤려 시무룩해하는 추천인이 있을거다. 의외의 장면이 나올지도. 굳이 스튜디오에 데려오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VCR로 따는 게 더 좋다.


3. 팬마스터는 4명이지만 감상평(팬 영업 멘트) 할 기회는 경연자 당 1명에게만 준다. 립서비스가 아닌 진짜 코멘트가 나오게 하려는 목적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경연자가 직접 하면 재밌을 것 같다. 진짜 팬이 되고 싶은 팬마스터가 경연자에게 호감을 표시하면, 경연자가 본인을 홍보할 1명을 고르고, 선택받은 팬마스터가 진심으로 투표를 독려하는 식이다. 경연자와 팬마스터 간의 유대감을 만드는 효과가 있다. 한편으로는 감상평 총량이 줄어 시청자의 부담이 줄 것이다.


힘 빼기는 참 어렵다


결론은 힘빼라!


<더 팬> 이야기를 한참 했지만, 사실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이 글 사실 반성문이다.


정신차려 이 시키야!


결과가 나왔다. 최종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실수인가? 아니 팩트다. 할 말은 많지만... 쓰자니 또 힘 들어간다. 다음에 써야지.


많은 분들께 힘내라는 응원을 받는다. 그때마다 감사함을 느낀다. 음... 하지만


2018년의 나에게 필요했던 은 ‘힘내라’가 아니라 ‘힘빼라’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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