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난 존재 의미가 있을까?
이세돌 9단이 남긴 말을 기억한다.
20년 넘게 했던 프로바둑기사를 그만두며.
"기본적으로 저는 바둑을 예술로 배웠거든요 처음에.
둘이서 만들어 가는 하나의 작품, 이런 식으로 배웠는데 지금 과연 그런 것이 남아 있는지..."
아마도 알파고 vs 이세돌 대국 이후.
세상은 그를 'AI를 이긴 최초이자 최후의 인간'으로 치켜세웠으나 정작 인공지능과 맞붙은 당사자는 막연함을 느낀 모양이다. 그의 심정을 짐작해 본다. 공허함이었을까.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가 눈앞에 있는 현실에, 나는 여전히 모든 걸 수 있는가.
6년 전, 유튜브 편집 알바로 3시간짜리 대담을 열 분 남짓한 영상으로 만들고 20만 원을 받았다.
아마 지금 그런 일거리는 다 사라졌을 것이다.
AI는 이미 말자막은 기본으로 쓰고, 컷 편집·블러(모자이크) 처리·카메라 지우기를 사람보다 빨리 한다.
나 또한 레퍼런스 이미지를 챗지피티에게 부탁한다. 아이디어 방향이 괜찮은지도 물어보고.
창작을 업으로 한다는 사람이 창작을 남에게 맡기다니, 뜨악할 일 아닌가.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미,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지점에서 AI는 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들은 거의 모든 걸 LLM에게 맡긴다.
자소서 작성, 코딩 점검, 데이터 정리. 그리고 고민 상담과 인생 조언, 연애까지.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빠르고 둘째 효율적이다.
딸깍 한 번에 수십 개 결과를 단숨에 뽑아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가 있다.
인간보다 효율적이고 빠르고 합리적'이라는,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최소한 기본빵은 한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니까.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점점 더 많은 것을 AI에게 일임한다.
그렇게 우리의 결과물은 점점 더 비슷해진다.
천편일률.
천 개의 질문이 모두 한 가지 법칙만 따르는 것처럼.
나는 그게 무섭다.
마침 세상의 가치는 획일화되고 있다고 느끼던 참이다.
자본주의가 점령한 2025년, 돈과 유명세가 전부 아닌가.
과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위에 너무 많다.
x축을 돈, y축을 유명세로 놓은 좌표평면을 깔아놓고 거기에 내 위치가 어디인지 열심히 가늠해 보는 사람들.
인생의 성공이 마치 1 사분면에 안착하는 것 마냥.
애초에 AI를 쓰는 이유가 뭐겠는가.
생산성 향상과 효율 극대화. '성공 기준의 획일화'와 'AI로 인한 천편인률적 결과'는 순환하며 공고화한다.
1사분면에 서기 위해 모두가 본인의 결정권을 인공지능에게 위임하는 미래.
이런 세상에서 능력도 생산성도 한참 부족한 인간의 행동엔,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AI가 다 하면 되는데.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을까?
2017년 어느 여름밤, 내가 PD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지 재밌을 것 같아서. 그게 다다.
성공하고 유명해지고 돈 많이 벌고 싶고....
그런 마음은 일 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직업인으로서 품게 된 꿈이지, 출발선에서 고려한 적은 없었다.
왜 더 효율적이고, 더 뛰어나야 하고. 더 유명해져야 하는 걸까. 내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어쩌면 AI가 반영해 줄 수 없는 성질의 것일 수도 있는데, 그저 나보다 더 능력 있다고 따라야 하는 건지. 그럼 내게 PD로서의 성공은 결국 더 잘 벌기 위한 유명함에 있는 거였나?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것도 결국에는?
...
뭐 쓸데없는 생각으로 그렇게 시간 낭비하냐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실 요즘 유독 재촉받는 기분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지만, 누군가의 성공을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
내 색깔을 드러낼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서.
혹은 그게 요원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어서.
그저 나만의 답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휴가 기간에 PD연합회에서 여는 AI 강의를 듣게 되었다.
제목은 'LLM을 활용한 방송 기획'
생성형 AI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도 보고, 입문 수준의 파이썬 실습도 해봤다. 인공지능으로 새로운 길을 내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엄청난 충격이었다. 와 세상은 이렇게 바뀌고 있구나.
아참, 이세돌 9단은 바둑기사를 그만둔 후, 별안간 보드게임 제작자로 활동했다.
'바둑을 잘 두는' 것이 아닌 '바둑 같은 게임을 만드는' 것으로 본인의 의미를 다시 찾으셨던 걸까나.
내 존재의미는 어떻게 찾으면 좋을까.
주머니에 두고 계속 꺼내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