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피디 적성 검사
적지 않은 피디 지망생 분들이, 내 브런치를 보신다는 걸 알고 있다. 글이 썩 도움이 되진 않아 대개 실망하셨겠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계속 신경을 쓰게 된다. 어쨌거나 지망생 분들께 뭐라도 도움 되는 건 없을까 하는. 어쭙잖은 부채의식이지만. 그래서 이번엔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글을 써볼까 한다.
방송 피디의 현실을 주제로 한.
이제는 널리 그 실체(?)가 알려졌지만, 사실 피디는 편한 직업은 결코 아니다. 불규칙적 일정과 도제식 업무 환경. 몸과 마음이 망가지기 딱 좋고. 요즘 같은 시대엔 메리트도 없어 보인다. 예전엔 돈과 명예가 따랐다지만 글쎄. 몇 년을 매달려 공채에 붙었는데 출근 한 달 만에 그만두는 동료도 더러 있다. 그러니 새로 진입하려는 지망생께는 되도록 만류하고 싶다.
뚜렷한 이유가 없다면 굳이 이 직업을 택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뚜렷한 목적만 있으면' 피디만큼 좋은 직업도 없다.
일단 나는 만족한다. 빡세다 고되다 궁시렁댔어도 '못해먹겠네' 뱉어본 적은 없다. 단언컨대, 월급을 조금 더 준대도 다른 직무로는 안 갈 것 같다. 아무래도 적성에 맞는 것이다. '사회적 위상'이 떨어졌다한들 계속 피디로 살고 싶은, 나 같은 분들도 계실 거다.
하지만 곤란한 게, 피디를 직업으로 삼는 행위는 2025년 대한민국에선 기회비용이 꽤 크다.
무슨 공인 피디 적성 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채 경쟁도 치열한 편이다. 그렇다면 피디가 나한테 맞는지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아쉬운 대로 내 짧은 생각을 털어놓으려 한다.
현주와 일본 다카마쓰를 여행한 적이 있다.
다카마쓰를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저렴한 비행기 값'이었다. 도착한 후 보니 예상대로 조용한 소도시였는데, 돈키호테 같은 대형 쇼핑몰도 잘 없고 '사누끼 우동' 말고는 별로 관광포인트가 안 보였다. 명색이 여행인데 특별한 뭔갈 하고 싶은데... 습관처럼 유튜브를 뒤지기 시작했다. '다카마쓰' 뒤에 [여행], [맛집], [브이로그] 같은 단어를 붙여 검색. 그 끝에 구미가 당기는 걸 발견했다. 무려 '돌핀 센터'. 돌고래와 수영을 하고, 살 맞대며 교감할 수 있는 체험장이 있다고 했다. 꽤 재밌겠는데?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인터넷에는 그 이상의 정보가 없었다.
다카마쓰 자체가 워낙 소도시이기도 하고, 돌핀 센터는 중심지에서도 10km 이상 떨어져 있어 한국인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통은, 여행 유투버나 블로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걸 발견하게 되는데, 이번엔 그런 게 없었다. 하나 찾은 한국어 리뷰에선 렌터카를 이용해 갔다고 했다. 뚜벅이인 우리는 기차든 택시든 버스든 타야 했다. 하지만 교통은 너무 복잡해 보이고(죄다 일본어다)... 구글맵 상 2km 내외에 식당도 없다.
이런 상황. 당신이라면 어떨지.
사실 불편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게 느껴졌다. 내가 만들어가면 되지. 흩어져 있는 정보들 중 몇 가지만 정리하기로 했다.
1. 스케줄 파악 및 돌고래 프로그램 준비물
- 센터 운영 시간과 돌고래 체험 프로그램 여부
- 끝나고 샤워할 데는 있는지? 돈은 얼만지? / 유의사항은 없는지?
>>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 모르겠는 건 문의사항 남겨놓아 답변 기다림
2. 동선 및 식사 상황 파악
- From 숙소 to 돌핀 센터, 최적의 루트와 가는 버스와 기차 시간표
- 점심과 저녁은 어디서 어떻게 먹을지? 업장은 있는지? 영업시간은?
>> 구글 맵과 현지 JR선 홈페이지로 얼추 확인 가능
그 외에는 '블로그에 나오지 않는' 정보라
그냥 직접 부딪혀 보자는 마음으로 두었다.
예상대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이어졌다.
'리쓰린공원-기타구치' 역엔 역무원이 없었고(간이역이라 무인으로만 운영되고 있었음) 매표 기계는 구권만 취급했으며(!) 그걸 시간표 5분 전에 알았다(!!). 우린 신권 지폐 몇 장밖에 안 갖고 있는데... 근처 편의점도 걸어서 최소 10분 거리. 그런데 말이다. 당연히 기차를 놓치는 거였는데, 운 좋게 지나가던 여고생이 구권을 거슬러줬다. 결과적으로는 매표에 성공.
구글 맵으로 찾은 츠루와 마을의 라멘집은, 알고 보니 1인 운영 매장이라 음식 나오는 데 시간이 엄청 걸렸다. 예정보다 1시간 딜레이. 그렇지만 이곳의 새우라멘은 존존존맛탱이었다. (현주에게는 거의 인생라멘이었다고... 나도 그랬다.) 돌핀 센터에도 꽤 지각했다. 우버도 버스도 렌터카도 없이 30분은 넘게 걸어야 했으니.
다 이런 식이었다. 조금은 낯선.
내겐 최고로 흥미롭던 하루였다.
인적 없는 곳을 걸으며 사진을 찍고, 바닷물은 겁나 추웠지만 돌고래 등에 타서 헤엄도 치고, 차도 옆에 난 벤치에서 군것질도 했다. 걱정과는 달리 샤워비도 안 내고 몸을 씻었다. 숙소로 돌아오던 밤, 그날 마지막 기차를 기다리며 현주와 얘기했다. 이런 게 여행의 재미가 아닐까? '리뷰가 별로 없네, 사람들이 잘 안 가나 봐-' 하고 돌핀 센터를 포기했다면 후회했을 거야. 지금의 즐거움을 알 리가. 모르는 채로 떠났기에 더 좋았달까.
'피디가 정확히 뭘 하나요?'
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각자의 상황과 위치(혹은 연차)에 따라 하는 일이 너무 다르기도 하고, 피디의 일이라는 게 결국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는 건데 별거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나 중요하지만 누구 앞에서 으스댈 만큼 엄청난 일도 아니라서 '피디가 이래요' 얘기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 난 입을 떼기가 망설여지곤 한다.
하지만 굳이 정리한다면
'검색 결과가 없는 상황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일' 정도?
이를테면 메인 피디는 '검색 결과가 없는 상황에서' 본인이 직접 만든 콘텐츠로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평가자는 대중이고.
그렇다면, 다소 부담이 되는 이 상황에서도
움츠리기보다는 '내가 뭔가를 해내야겠다'거나 '이뤄보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사람은
이미 연출자로서의 자질을 품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 지점이 피디가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즐거움이자 스트레스라고 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