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면 다 핑계다.
'첫 방송'이라 적은 다음 바로 올리는 글의 제목이 이거라 씁쓸하지만 이 문장을 단물 빠지도록 씹어본 한 달이다.
<오은영 스테이>는 8화로 멈췄다.
성과는 있었다.
높진 않더라도 시청률은 점점 올랐다. 첫 방송 이후 한 번도 떨어진 적은 없다. 유명 커뮤니티 게시판에 오르내릴 만큼 화제성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난 이 프로그램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놔뒀으면' 알아서 궤도에 오를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의 사정' 때문에 제작이 잠정 중단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어떠한 기준에서는' 성공하지 못했기에.
결과는 정해졌고 누굴 붙잡고 따질 수도 없는 마당이지만, 왜 이렇게 된 거야.
연출로서 할 말은 많다. 주 내용은 불만이다.
회의하다가, 자막 쓰다가, 마스터 수정을 하며. 전방위적으로 화와 짜증이 불쑥 치밀었던 나날들.
체크리스트 쓰듯 적으면 10개는 훌쩍 넘을 테다.
하지만 8화를 다 내보낸 지금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불만들도, 결국 이겨내야 했던 거였구나.
과정에서 누군가의 겐세이가 들어갔건 얼마큼 우여곡절이 있었건.
알아주지도 않을뿐더러 알아줄 필요도 없다.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과 같은 과정이었고, 그 바람이 지나간 곳에는 결과만 남는다.
당시에 내가 느낀 불편한 감정들은 이제는 옅어지다 못해 손에 잡히지도 않을 만큼 사라졌다.
그 자리에 서서 뱉는 한탄은 일종의 매몰 비용일 뿐이다.
열심히 하는 건 아무 필요 없다.
프로의 세상에선 결과로 보여줘야 한다.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이 앞서, 난 그 사실을 잠깐 잊어버린 것이다.
소파에 누워 브런치 이 글을 구상하다 보니
어릴 적 봤던 이름 모를 일본영화가 머릿속에 맴돈다. 아마도 이런 줄거리다.
신인 감독인지 감독 지망생이던(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주인공 청년은 자기가 만들려는 시나리오가 있었다.
그런데 찍으려고 보니 중간 과정이 꽤 많았다.
수정을 강요하는 투자사와 제작사, 별로니까 이렇게 바꿔보자는 선배들? 과 배우들(스태프였었나...). 자기가 쓴 시나리오에 손을 얹는 존재가 꽤 많다는 걸 주인공은 알게 된다. 현실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걸. 그리고 한참을 열심히 영화를 찍어내는 감독. 어찌어찌해서 결국 마무리한다.
그런데 완성본을 보니 모두가 실망한다.
최초의 시나리오는 사라지고 영화는 네 맛도 내 맛도 아니게 마감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아닌데...' 하며 허탈한 표정의 신인 감독 모습으로 끝나던 그 일본영화.
(인터넷을 뒤져도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내가 많이 각색했는지도...)
고등학생 때 그 영화를 처음 접하고, 엄청 답답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보니 이런 일은 부지기수다.
부지기수인 정도가 아니라, 세상은 원래 이렇게 흘러간다.
후배들한테 꼭 이런 조언을 한다는, 나영석 피디님의 인터뷰도 맴돌았다.
가장 중요한 건 말이야. 네가 하고 싶은 거 말고, 회사에서 인정할 만한 거 세 번만 하라고.
그러면 네가 하고 싶은 거 한번 기회가 올 거라고.
지망생 때 무심히 넘긴 말이 이제 꽤나 또렷하게 보인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서 대단히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구성도 편집도 비주얼도. 정말 기대하고 바랬다. (불만이 많았다는 건 그만큼 기대가 컸던 거겠지)
그런데 원하는 대로 하지 못했다. 오랜 기간 가로막힌 채로 출근한 기분이 들었다.
뭐... 그랬다. 결과적으로는 최선을 다해 '회사에서 인정할 만한 것'과 '우리가 하고픈 것'을 오간 몇 개월이었다.
두 영역의 경계를 가늠해 본다고 진을 다 뺀 것 같다.
그만큼 정말 많이 배웠고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리고 운 좋게도, 메인 연출 선배와 가까이서 일하는 환경이어서 더더욱.
이미 지난 얘기지만.
프로그램이 중단된 덕(?)에 짬이 났다.
<대학전쟁3> 팀에 임시 합류해 촬영도 도왔다가,
이제 며칠 집에서 쉰다.
아직은 요원하지만.
'책임'이라는 단어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인다.
나의 연차는 점점 차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커버해야 하는 영역도 더 커지고 있다.
누군가의 뒤에 있기보단 가장 앞에 나서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질문을 하기보다 질문을 받는 게 더 많고.
나만의 것을 확실히 만들어야만 해.
생겨나는 다짐과 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