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쉬어 가는 글 하나.
‘학교 밖 선생님’ 연재를 보시며 느끼셨겠지만, 나에게는 괴팍한 면이 있다. 예를 들면... 납득하지 못하면 누가 시켜도 최대한 버틴다. 대세나 트렌드라는 말을 싫어해서 남들이 하는 건 좀처럼 따르지 않는다. ‘해야 한다’는 말에 언제나 의문을 품는다. 이런 모습. 좀 이상한 사람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한 아저씨 때문이다.
2006년의 이야기다. 공부로 스트레스받는 고1, 그게 나였다. 지금이야 편의점 맥주 한 캔 마시며 예능 한편 보겠지만, 그때는 미성년자였다. 술은커녕 밤도 즐길 수 없던 시기. 그나마 게임을 하며 풀었다. 위닝일레븐, MVP 베이스볼, 팡야... 토요일 새벽이 가장 신났다. 독서실 끝나면 새벽 1시 반.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마음껏 키보드를 두들긴다. 보통 3시까지. 삘 받으면 4시까지.
그러던 어느 토요일, 노래들이 좀 지겨워졌다. 라디오가 떠올랐다. 그 왜 있지 않나. 새벽 라디오 하면 떠오르는... 차분한 톤의 아나운서 목소리. 영화와 OST를 소개해주거나, 청취자의 사연에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어요.” 위로 한마디. 귀가 벌써부터 간질간질하다. 슬슬 졸렸기 때문에 조금 듣다 잘 생각으로, MP3의 라디오 기능을 틀었다. 95.9, MBC FM4U.
악 – 우에에에엑
깜짝 놀라 황급히 이어폰을 뽑았다. 누가 토하는 소리였다. 시바!! 귀신인가!! 음량을 1로 줄이고 다시 들어봤다.
징지지지징징 징지지지징징 징지지지징징
기계를 긁는 듯한 굉음. 근데 가사가 나온다. 음악이다 음악. 헤비메탈! 아니 새벽 2시 반에 헤비메탈이 웬 말인가. 잠이 확 깼다. 상상해 보시라.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 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방. 그리고 헤비메탈! 개무섭다. 노래가 끝나자 멘트가 이어졌다. 아저씨의 음산한 목소리. DJ가 아니고 어둠의 자식인가... 어쨌든 나는 그 상태로 얼어버렸고, 홀린 듯 라디오를 끝까지 들었다. 그게 첫 만남이다. 프로그램 이름이... 고스트네이션? 청취자들은 마왕을 찾았다. 그리고 그 음산한 아저씨가
마왕, 신해철이었다.
방송시작 전 경고문이 왜 그리 설레던지 (출처:MBC, 나무위키)
그 이후로 나는 점점 어둠의 자식이 되어갔다. 틈이 날 때마다 고스트네이션(이하 '고스')을 들었다. 묘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방송과는 아예 달랐다. 일단, 고스는 신청곡을 받지 않는다. 게스트도 없다. 60분 내내 수다만 떠는 경우가 부지기수. 반대로 한 시간 내내 노래만 나오기도 한다. 혹시 22분짜리 트로트 삼태기 메들리를 아는가? 마왕은 아무렇지 않게 튼다. 그런 걸 틀고 좋아한다. 이렇게 변태 같은 DJ라니... 가끔은 끝나기 10분 전에 낯선 목소리가 나온다. “작가입니다. 마왕님이 방금 친구가 나이트에서 놀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가버렸습니다. 대신 노래 틀어드리겠습니다.” 지금 봐도 기가 찬다.
백미는 ‘좀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 매주 수요일에 하던 상담 코너인데, 청취자들이 보내온 사연으로 진행한다. 제목만 봐도 장난 아니다.
남자 세 명이 동시에 좋다 / 아빠에게 애인이 있는 것 같다 / 엄마의 새 애인 / 부모님께 성관계를 들켜버린 고3 커플 / 가짜일지도 모르는 거지에게 적선을 해도 될까 / 유부남 교사에게 사랑에 빠진 여고생 / 동생이 알고 보니 동성애자 / 친구의 강박증...
심각한 사연들 앞에서 마왕은 운을 뗀다.
"제가 거듭 말하지만 ‘좀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는 그 고민을 한 사람의 입장에서 고민을 같이 해주는 곳이지, 그 사람이 잘했다 못했다 선악을 판단하는 재판소는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당신의 얘기나 일이 좋은 일이다 나쁜 일이다 얘기하진 않아요.”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본인의 생각을 말한다.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차근차근 (내용이 궁금하다면 유투브에서 ‘신해철 고스트네이션’을 검색하시길!)
이 방송을 통해 몇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세상은 무척 넓다. 나의 세계는 내가 움직이는 정도, 구로구와 구일고등학교, 딱 그 정도였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마왕은 사회 곳곳에 숨어 사는 약자들을 알려줬다. 사회의 온갖 추악한 모습들도 알려줬다. 그리고 상담소에서 듣는 식구들의 이야기까지. 상상도 못 해 본 삶이 많았다.
둘째, 세상에 정답은 없다. 마왕은 매번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논쟁을 할 때마다, 현상의 근본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신선했다. 나는 이제껏 그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는 아주 순종적인 타입이었는데, 내가 배우는 게 무조건 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뭔가 큰일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지시를 어긴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고... 하지만 마왕의 얘기는 내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주었다.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옳고 그름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세상이 다 그렇더라.
그 결과, 나는 괴팍한 어른이 됐다. 건방지다는 얘기 가끔 듣고, 오해 때문에 피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 덕에 내 인생은 더 재밌어졌다. 정답도 없는 이 넓은 세상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면 그렇다. 그리고 행복해졌다. 나만의 색깔이 있고 그걸로 어떤 결과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면 뭐. 의외로 문제 안 일으키는 타입. 나는 나대로 장단점이 있고 남들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것이다. 소위 ‘잘 나가는’ 남과 비교해도 덜 부럽고(확실히 돈은 좀 벌고 싶...) 덜 아프다.
마왕이 할아버지가 되도 나는 고스를 들었을 거다. 내 마음과 똑같은 댓글이 있길래... (출처: 유투브)
선생님이 되니까 조심스럽다. 말과 행동을 되돌아본다. 실수하는 건 아닌지, 악영향을 주는 건 아닌지. 어떤 모습이 좋을까? 그러다 보면 ‘어떤 어른이 멋있었지? 도움이 됐지?’고 스스로 묻는다. 음... 역시 마왕이 먼저 떠오른다(저를 가르치신 많은 선생님들, 기억 못 해서 죄송합니다!). 마왕은 나의 존재 자체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마왕은 나의 아저씨다. 그래서 요즘 예전 고스 녹음을 자주 듣는다. 마왕 목소리가 그대로다. 좋다. 마왕 낄낄댈 때 나도 낄낄거린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나는 한 번도 고스 게시판에 글을 써 본 적이 없다. 항상 생각만 하다가 잠들고 말았다. 그래서 너무 아쉽다. 아시다시피 마왕은 떠나버렸으니까. 지금도 고스가 하고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만약 이 구구절절한 사연을 마왕이 읽는다면, 혀를 끌끌 차며 말할 것이다. ‘괘씸합니다. 10년 전부터 들었는데 이제야 글을 올렸으므로, 아이디 48시간 정지.’ 그래도 좋으니까...
쓰다 보니 길어졌다. 쉬어가는 글은 여기까지.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네.
마무리는 마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