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책을 다시 펼쳐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그 책들은 없어졌을 거다. 졸업식 때 찢기거나 태워졌으므로.
나도 그랬다. 과외를 할 때 문제집을 몇 번 들춰본 적은 있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볼 필요가 있었다. 센터에서 정한 공식 교재가 있었고, 나도 한 권 받았다. 정독 시작!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학생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불편한 감정. 내가 문제인지 아니면 교과서의 잘못인지 조금 고민이 됐다. 여기에 몇 개를 소개한다.
#1. '사실과 가치'
문제) 다음 중 가치 판단에 해당하는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최대의 섬이다.
ㄴ. 등교할 때는 버스보다 지하철이 더 빠르다.
ㄷ. 벚꽃이 만개할 때가 가장 예쁘다.
ㄹ. 우리나라 출산율은 매우 낮다.
선지) ① ㄱ,ㄹ ② ㄴ,ㄷ ③ ㄱ,ㄷ ④ ㄴ,ㄹ
이 문제의 답은 ②다. 해설을 보자.
가치판단은 어떤 대상의 의미나 중요성, 값어치에 대해 주관적으로 평가하여 서술하는 것이다. 따라서 ㄴ, ㄷ는 가치 판단. ㄱ, ㄹ은 사실 판단이다.
언뜻 보면 맞아 보인다. 하지만 가르쳐야 하는 내 입장에선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출산율이 절대 낮은 게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출산율이 1% 미만이라고 했다면 누가 봐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ㄹ, 이게 정말 사실에 관한 판단인가?
#2. '갈등'
의미) 당사자들의 목표나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서로를 적대시하거나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것
특징) 사회적 분열과 혼란을 유발한다.
책은 ‘갈등’을 나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없는 게 좋다는 식으로. (물론 이후에 추가 설명이 있긴 했다. '사회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 주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도록 함으로써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함.' )
하지만 갈등이 나쁜 것인가? 그리고 싸우는 것이 무조건 갈등인가? 회식 자리에서 가서 입 다물고 표현 못하는 것도 갈등이다. 다만 그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갈등은 당연한 현상이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 오히려 갈등을 인정하지 않는 게 나쁘다. 그런 조그마한 갈등이 쌓이고 쌓이면 큰 문제가 되니까. 크게 빵 터진다. 세대 간 혐오, 성별 간 혐오도 시작은 그런 것 아닌가? 문제는 갈등이 아니고, ‘갈등을 숨기는 분위기’ 때문인 것 같은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비판적 사고. 교육과정에서 아주 강조한다. 학생들이 꼭 비판적 사고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교과서는 갈등은 그저 나쁜 것이라 말한다. 동시에 협력이 좋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설명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는 나머지 학생들에게 협력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교과서는 답을 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청소년들이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을까. 교과 내용과 현실 사회가 너무 동떨어져 있다. 내가 아는 사회는 정답이 없는데.
잠깐 멍 때렸다. 살짝 망설여진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생각은 교과서와 다른데요...라고 말해버리면 헷갈려할 것 같다. 게다가 이 친구들은 검정고시를 잘 보려고 모였다. 그런 의미에서 교과서는 가장 중요한 바이블이고.
결심했다. 내 역할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다. 명색이 사회 선생님인데 정말 사회를 가르쳐주고 싶다. 여러분이 학교가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학교 밖 청소년’을 선택한 것처럼, 책에 나온 이 내용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게, 내가 할 일이다. 이 친구들이 내 의도를 잘 이해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용기를 좀 내보았다.
"이 문제는 제가 보기엔 엉터리네요. 문제에 문제가 있어요. 그걸 설명해 볼게요"
별 일은 없었다. 학생들은 조용히 들어줬고, 수업은 끝났다. 하지만 나는 그 후로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괜찮은건가. 나는 잘 모르겠다. 후.
교과서가 잘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