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달 동안 많은 ‘학교 밖 청소년’을 만났다. 그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는데, 그와 나 사이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주인공은 중등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16살의 여학생 S. 첫 만남부터 강렬했다. 고등 검정고시반과 달리 중등반은 학생 수가 3명으로 적어서, 마치 개인과외처럼 학생과 선생이 한 테이블에 오밀조밀 함께 앉게 되는 구조다. 성공적으로 고등반 첫 수업을 끝낸 터라 (4화 참고) 조금 들떠 있던 나, “안녕하세요~!”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앉으려는데 누군가 불쑥 가로막는다. S였다.
“선생님, 저는 100점을 맞고 싶거든요.”
앗, 빈틈없는 90년대 서울 사투리(모르시겠다면 유투브에서 한번 들어보시길...!) 야무짐과 차가움 사이 어딘가에 있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다. S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한번 지켜보겠다는 표정. 중등반 첫 수업도 ‘자기소개’로 때우려던 터라 당황했다. 아직 통성명도 안 했는데... 그리고 나 솔직히 교과서 들춰보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갔지만 75분이 너무 길었다.
나한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하라는 수업은 안하고!
똑소리 난다는 말이 어울리는 친구. S는 같은 반 애들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너무 똑똑한 S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친구들이 그런 S에게 적응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어린 시절에는 으레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따돌리고 따돌림당하니까.
다행히 S는 우울해하기보다는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듯 보였다. 특히 J외고에 엄청나게 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검정고시 올백을 받으려 하는 거고. 실제로 성적도 좋고, 또래에 비해 목표가 뚜렷했다. 씩씩하고 당찬 모습이 드라마 <SKY캐슬>의 예서 같았다.
선생님이 저 외고 가는 거 책임져 줄 거냐고요! (출처: JTBC)
다그치는 듯한 말투 때문이었을까, 묘하게도 나는 S가 무서웠다. “선생님, 진도 안 나가나요?” “이거는 언제 해요?” “기출문제는 몇 번 푸나요?” S는 자주 불안해했는데, 특히 진도가 잘 안 나간다는 상황에 대해 압박을 느끼는 듯했다. 옆에 있으면 괜스레 찜찜해졌다.
한 번은 내가 개념 하나를 놓고 한참 설명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S는 답답한 듯 페이지를 뒤로 넘겼다가 밖을 쳐다봤다가 몸을 배배 꼬았다. 불안함을 못 참더라. 나는 본래 순한 편은 아니라 짓궂은 마음이 생겼고, 왜 S가 그렇게 진도 나가기에 집착하는지 파헤치고 싶어졌다. 대화를 시작했다.
대화 1
나: S 친구는 공부를 왜 해요?
S: 공부를 해야 성공하잖아요.
나: 왜 공부를 하면 성공해요?
S: 공부를 잘하면 아무래도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는 것 같은데요.
나: 공부 잘하면 인정받아요?
S: 엄마도 그랬고요. 학교에 있을 때 선생님들도 다 그렇게 말했는데요.
나: 왜 공부 잘하면 인정을 받아요?
S: ... 암튼 우리나라에서는 다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중략)
S: 선생님, 그냥 이런 얘기 하지 말고 공부하면 안 돼요?
나: 왜요? 저는 이게 더 중요한 공부 같은데요!
S: 그럼 지금 진도를 못 나가잖아요.
나: ...
가끔은 문제 풀다 딴지도 걸어봤다.
대화 2
나: 3번, 답 맞았어요. 근데 왜 답이 3번이죠?
S: 온대 기후에는 사람이 많이 사니까요.
나: 왜 온대 기후에는 사람이 많이 살까요?
S: 살기 좋으니까요.
나: 뭐 때문에 살기 좋을까요?
S: 그거야 당연하죠.
나: 왜요?
S: 그렇게 책에 나와 있었는데요.
나: ...
S: ...
누가 보기엔 이런 느낌이었을 수도... (출처: tvN)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어느새 우리는 싸우고 있었다. 아마 S는 내가 시비를 건다고 느꼈을지 모르겠다. 사실 맞다. 생각을 틔워 주고 싶었다. 물론 S는 똑똑하다. 나보다 아는 게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자기 거는 아닌 것 같았다.
S가 말했다. 자기를 대하는 모든 어른이 공부를 강요했는데(추측컨대, 16살 여학생이 마주쳐 온 어른이란 부모님과 친지, 학교 선생님 정도?)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그렇다면 모르긴 몰라도 대체 공부가 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을 거다. 언젠가 큰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의 나처럼.
하지만 내가 무슨 권리로 남의 생각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다 한들 소용도 없다. 나도 안다. 그래서 질문만 계속했다. 왜? 왜? 본인의 답을 한번 찾아봤으면 좋겠어서. 그거 말고 내가 도와줄 게 없다. 이미 검정고시는 충분히 통과할 실력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대화는 지난하게 이어졌다. S는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엔 머리가 아프다더니, 다음 주엔 진도 안 나간다며 보채는 횟수가 줄었고, 그 담주엔 재미를 느끼는 듯했다. "음... 한번 생각해볼게요" 후후...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웰컴 투 어른의 세상.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S는 결국 수업 포기를 선언했다. "선생님, 저 이제 수업 안 들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도 기출문제 풀어봤는데 100점 맞았어요."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쓱 내민다. 그리고 어색하게 꾸벅 인사. 어쨌든 그게 마지막이었고, S는 더 이상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아쉽지도 않은 척 쿨하게 손인사를 날렸지만, 뒷맛이 영 씁쓸하다. 왜 그렇게 고약하게 몰아붙였을까, 자책이 들다가도 아무튼 간 S의 표정을 떠올리면 조금 더 고집을 부렸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함부로 단정 짓고, 비판하고, 화내고, 미워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렵다.
그래도 왠지 S의 서울 사투리가 귀를 맴돈다.
"힘든데요, 어쩔 수 없잖아요. 어쨌든 외고를 가야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는데요."
"다들 그렇게 얘기하는데요."
어쩌면 틀린 말도 아니지만,
인생은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