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의 마지막 장이 낙엽의 신세가 되어 초라하게 달려 있다.
봄이 왔다. 봄의 시작은 겨울의 끝이기도 하다. 여기 분위기는 겨울의 끝에 가깝다. 익숙해진 만큼 설렘이 줄었다. 출근 시각이 점차 늦어진다... 내가 이런데 학생들은 어떠했겠는가. 수업이 되면 그들은 뭔가를 적는다. 질문은 없고 그저 묵묵히 적기만 한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아쉽지도 않고 그런가 보다 하고 지금 몇 시인가 딴생각을 한다. 우리는 별 감흥 없이 주어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검정고시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시험이 다가오며 내 역할은 줄어갔다. 본래 공부는 이해와 암기의 콜라보. 내가 할 수 있는 건 학생들이 교과 내용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뿐이다. 이해한 지식을 그들이 소화하고 활용할 때가 되자 내가 할 일이 없어졌다. 암기는 각자의 몫이다.
중요한 개념은 이미 다 설명했고 더 이상 나갈 진도도 없다. 수업이 두어 번 남았을 때 본격 시험 대비 모드에 들어갔다. 3년 치 기출문제를 같이 실전처럼 시간 재서 풀고, 채점 후 해설하는 식. 시간이 남으면 자습 혹은 개인 질문을 한다.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2달치 수업을 총망라한 ‘파이널 핵심 개념 프린트’도 만들어 나눠줬다. 자, 이제 여러분들 차례예요.
몇 년도 기출문제였나, 학생들에게 프린트를 나눠주고 보니 딱히 할 게 없었다. 가만히 있기 심심해 같이 풀어봤다. 문제는 총 25개. 눈치껏 상식으로 풀 수 있는 게 있는가 하면, 교과서를 꼼꼼히 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못 푸는 것도 있다. 참고로 수업 때 나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이건 단순 암기 항목인데요,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아는 게 더 정확하고 빨라요. 100점을 맞고 싶으면 그렇게 외우세요. 저는 그냥 틀리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다(ㅋㅋ). 92점. 암기 문제 2개를 틀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준수하다. 합격 커트라인은 60점이니까. 학생들은 여전히 풀고 있었고.. 나는 들떠서 외쳤다.
“다 풀면 저를 주세요. 채점해드릴게요~ 본인이 틀린 거 확인하고 나서 교재로 공부하면 됩니다. 보니까 제가 뽑아 준 ‘핵심 개념 프린트’만 잘 봐도 최소 84점은 맞을 수 있어요. 제가 가르쳐 드린 대로만 하면...!!!”
하나 둘 시험지를 내민다. 채점을 시작합니다. 100% 합격을 기원하며 오오.. 다들 잘 봤다. 근데 잘 봐도 너무 잘 봤다. 100점이 한 명, 92점이 한 명. 나머지도 다 7, 80점 내외다.
얼마 전 은퇴한 스피드스케이팅 이상화 선수의 인터뷰.
-세계기록이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언제까지 안 깨졌으면 좋겠나.
"욕심이지만 영원히 안 깨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선수들 기량을 보면 많이 올라왔다. 36초대 진입이 쉬워졌다. 언젠가 깨지겠지만 1년 정도는 유지됐으면 좋겠다."
시험지 위에 ‘100’이라고 크게 쓰는데 그 인터뷰가 떠올랐다. 아, 묘하다. 학생에게 이 종이를 돌려주러 가는, 30초도 안 되는 시간이 복잡했다. 솔직히 기쁨보다 당혹스러움이 먼저였다. 머쓱하고 뭔가 어색했다. 잘했다고 축하하기엔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피식 웃었다. 어이없네. 내가 선생님으로 불리더니 대단한 착각에 빠졌나 보다. 당혹스러울 건 뭐고 민망할 건 또 뭔가. 세상의 모든 스승은 제자에게 추월당한다. 나는 바보다. 무슨 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었나, 쿨한 척은 혼자 다 해놓고는(ㅋㅋㅋ).
생각해보니 나쁘지는 않다. 100점을 맞은 H 학생은 내 덕에 나보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H 덕에 내가 기회를 얻은 것일 수도 있다. H가 성장하는 데(혹은 H가 똑똑해지는 데? 아님 H가 청소년기 어딘가를 잘 살아가고 있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 재밌다. 기분이 좋아진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진심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저보다 잘하네요!"
마지막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헤어질 때 다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