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모두 연기가 아니겠느냐
얼마 전, 정말 원하던 방송사에 떨어졌다. 그것도 전형의 초반부인 필기시험에서. 자신 있었고, 일찌감치 다음 단계를 준비했건만 결과가 그렇게 됐다. 마음을 다잡기 어려웠다. 창 밖에는 낙엽이 떨어지고, 주변의 합격 소식도 슬슬 들린다. 이래저래 싱숭생숭했다. 불교 서적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연기(緣起)’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인연 연’에 ‘일어날 기’, 모든 것은 그렇게 생겨날 만한 조건이 갖춰졌을 때 생겨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라디오를 켜면 소리가 난다. ‘기’에 해당한다. 없던 소리가 생겨난 것이다. 라디오 소리가 나기 위해선 무수한 조건이 필요하다. 전파를 보내는 방송국이 있어야 하고, 전파를 수신하는 라디오가 있어야 하며, 라디오를 켜는 사람의 동작도 필요하다. 이건 ‘연’이다.
그러나 의존해야만 있을 수 있다면 영원할 수 없다. 방송국이 파괴되면 소리는 멈춘다. 배터리가 닳아도 소리는 없어진다. 기는 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는 소멸의 의미도 포함한다.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함께 변하고 소멸한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연은 곧 기다. 배터리가 닳은 이유는 전력이 계속 소비됐기 때문이다. 불교는 우리의 본래 모습도 이와 같다고 말한다.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난처한 질문이다. 고정된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컵에 들어가면 컵 모양, 바가지에 들어가면 바가지 모양이 되는 게 물이다. 그리고 하나 더. 물 그 자체도 그저 기에 불과하다. 조건에 의존해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온도가 올라가면 수증기가 되어 증발한다.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는 것이다. 혹은 다른 조건에 의해 또 다른 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세상의 진짜 모습은 이것이라 해도 틀리고 저것이라 해도 틀린다.
물은 어떤 모습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바가지로 들어가는 순간 금세 100퍼센트 바가지 모양이 된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바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거기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다. 불교에서는 말하는 삶이 그렇다. 모든 것은 연기이므로 고정된 모습이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한때의 자기 모습을 영원히 고정된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마치 물은 늘 컵 모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괴로움은 여기서 시작된다. 나의 진짜 모습은 사장도 아니고 알바생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사장이라고 고집하는 순간, 회사 밖에서 사장님 대우를 받지 못하면 화가 난다. ‘사장’이라는 나의 모습에 집착하기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괴로움을 겪는다. 나도 그렇다. 도서관에 가면 친구와 놀고 싶고, 막상 친구와 놀면 공부해야 한다고 걱정한다. 그러니까 괴롭다. 매일이 괴로움 파티다.
한참 책을 붙잡고 있을 때 불알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보자고. 친구는 갈팡질팡하던 나와 달리 졸업과 동시에 마케팅 회사에 들어갔다. 매 순간 승부사가 되고 싶어 하는 놈. 성향이 정반대인데 그래서인지 얘기가 더 잘 통한다.
녀석은 뭘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지 앉자마자 털어댔다. 회사생활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 본사가 인수한 곳으로 자기가 파견갔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경계가 장난 아니다, 그래서 힘들다는 토로. 짜식, 많이 정신없겠다. 잘해봐라. 그 이후에는 내 근황. 면접에서 떨어졌다, 지금은 이렇게 준비한다, 점점 더 욕심이 생긴다 등등. 내 말을 듣더니 녀석은 한참을 생각한다.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러다가 잔을 부딪히고 말했다.
“너 얘기 들으니까 내가 초심을 잃은 거 같다.”
친구가 말했던 초심은 뭐였을까. 취준생의 절박함? 아니면 꿈을 향한 다짐? 어쨌든 친구의 말에 나는 바로 장기하와 얼굴들(이하 ‘장얼’)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장얼의 해체 선언을.
성공과 관련한 경험은 누구나 비슷하다. 첫째, 우연이든 계획이든 성공을 거둔다. 둘째, 성공이 성공을 가져온다. 작은 성공 덕에 큰 기회를 얻는 식이다. 그 반대일 때도 있고. 셋째, 시간이 지날수록 상승세는 꺾인다. 결국엔 정체한다. 효율도, 감흥도 떨어진다. 그때가 되면 이제 초심을 찾는다. 처음 성공했을 때, 혹은 가장 패기 넘쳤을 때를 떠올리려고 애쓴다.
장얼은 성공한 밴드다. 앨범을 4개나 냈다. 시기적으로 따지면 초심을 찾을 법하다. 그러나 장얼은 해체를 선언했다. 그리고 당차게 말했다, '초심 따위 개나 줘버려.' (5집 <mono> 8번 트랙 ‘초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