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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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초심 따위 개나 주라고 했을까, 그들의 해체에 어떤 의미를 담을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를 下편에 써보려고 한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뭔 말인지 알겠지마는 그건 니 생각이고~ 이건 그냥 내 생각이고~
대중음악계에서 장기하는 혜성 같은 존재였다. 싸구려 커피를 모르는 2,30대가 있을까? 기타 쫌 친다는 사람은 다 튕겼다. (나도 과실에서 열렬히 불러제꼈다.) 그 입소문에 평론가가 반응하며 장기하 신드롬은 완성됐다. 2009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노래상, 올해의 노래, 그리고 네티즌 선정 올해의 남자 음악인, 모두 그의 차지였다. 성공은 성공을 낳았다. 록 페스티벌의 붙박이 주전, <유희열의 스케치북> 다수 출연, <무한도전> 캐스팅까지.
그러는 동안 장기하 음악의 무게중심은 개인에서 밴드로 옮겨졌다. 1집 <별일 없이 산다>는 사실상 원맨 앨범이다. 수록곡 소개를 보자. 작사, 작곡, 편곡 모두 장기하다. 2집은 조금 변화가 있다. 김현호, 정중엽, 이민기, 하세가와 요헤이, 이종민. 편곡 란에 5명의 세션이 추가된다. 실질적 장얼의 등장은 3집 <사람의 마음>이다. 비로소 편곡에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이름이 실린다(김현호 님의 입대로 빈 드러머 자리를 전일준 님이 메꾼다). 그에게서 풍기던 싸구려 커피의 향은 이제 희미하다. 장기하 개인이 수많은 조건을 만나 장얼로 거듭난 것이다.
Q. 얼굴들 각자 지난 세월 동안 한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오게 만든 음악적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장기하: 기타리스트 이민기는 대학 동아리 출신 연주자다. 전공자가 갖지 못한 특유의 개성적인 손맛이 있다. 베이시스트 정중엽은 노련하다. 그리고 기타리스트 출신의 베이시스트이기 때문에 다른 베이시스트와는 접근법이 다르다. 키보디스트 이종민은 연주가 깊다. 특히 오르간과 클라비넷 연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기타리스트 겸 프로듀서 하세가와 요헤이 형은 늘 아이디어가 많다. 편곡이 ‘2프로 부족할’ 때 화룡점정을 찍은 적이 많다. 드러머 전일준은 연주력이 출중하면서도 보컬리스트 출신이라 노래를 부르며 드럼을 칠 줄 안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모두 성격이 좋다. 밴드를 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안다. 성격이 안 맞으면 10년을 함께할 수가 없다. (출처: VIBE MAGAZINE 인터뷰)
대중은 장기하가 익숙해졌다. ‘장기하와 얼굴들’과 ‘장기하’는 엄연히 다르지만 그걸 굳이 구분하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을 소개할 때 항상 따라오던 ‘파격’이란 단어도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익숙함은 곧 식상함을 낳는다. ‘송곳 같은 날카로움이 빠지고 맹맹해졌다, 세련되진 노래만큼 예전 감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화제성이나 음악성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조금씩 내려오고 있다’ 등. 장기하와 얼굴들의 3집에 이런 혹평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장얼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또 시간이 흘러 5집 <mono>가 나왔다. 그리고 장얼은 “장기하와 얼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라는 말과 함께
해체를 선언했다.
애초에 나는 혼자였지 / 나는 아무도 필요 없지 / 채팅도 혼자 할 수 있지 (Track 3 나와의 채팅)
나는 혼자 앉아서 / 가만히 눈을 감고서 / 내겐 이젠 아무도 / 필요 없다 되뇌이네 (Track 6 아무도 필요 없다)
모두 다 아무런 소용 없지만 나 혼자 별다른 수가 없잖아 / 그나마 다행인 거는 있잖아 나 혼자만 이런 건 아닐 거야 (Track 7 나 혼자)
그 누가 다시 내게 와준다면 역시나 나는 반가워할 거야 / 하지만 어느 순간엔 또 다시 나 혼자 걸어가고 있을 거야 (Track 9 별거 아니라고)
초심을 향한 고민, 답은 해체였던 것 같다. 곳곳에 이별이 쓰여 있다. 앨범 제목부터 <mono>다. 사운드가 하나의 채널에 형성되는 것을 일컫는 용어, 쉽게 말해 홑 채널. 스테레오도 모자라 서라운드가 당연한 지금 이 시대에.
쿨하게 이별을 고한 장얼을 보며 나는 다시 불교의 연기(緣起)를 떠올렸다. 인연 연에 일어날 기, 모든 것은 그렇게 생겨날 만한 조건이 갖춰졌을 때 생겨난다는 의미다. 물은 어떤 모양인가? 바가지에 담으면 바가지, 컵으로 옮기면 컵 모양이 된다. 그러다가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면 없어진다. 어떤 모습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데 물에 모양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혹은 물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괴롭다. 괴로움은 고정된 관념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난다.
초심을 찾아야만 한다는 마음, 새 앨범은 어때야 한다는 마음, 장얼다워야 한다는 마음... 이런 거 사실 어느 한 모습을 향한 집착 아닐까? 물은 물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한때의 모습을 영원히 고정된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싸구려 커피를 찾을 때의 장기하는 당시의 연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금의 장얼은 그때와 다른 새로운 연들로 인해 일어났다. 그들은 10년 동안 많은 일을 겪었고 성장을 했을 거다. 그냥 그거다. 그래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옛날에 내가 어떤 놈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이 길이 내 길인 줄 아는 게 아니라 / 그냥 길이 그냥 거기 있으니까 가는 거야 / 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 가다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 거야 (Track 1 그건 니 생각이고)
나는 옛날이랑은 다른 사람 / 어떻게 맨날 맨날 똑같은 생각 / 똑같은 말투 똑같은 표정으로 / 죽을 때까지 살아갈 수가 있겠어 (Track 8 초심)
그래서 나는 너무 슬퍼하진 않기로 했다. 해체는 어쩌면,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편안함을 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 장얼의 해체로 싱숭생숭한 분들에게 권한다. 장얼을 향한 유무형의 기대가 어쩌면 아주 조그마한 나의 집착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으니 그런 마음일랑 잠시 내려놓고 그냥 지금의 음악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기대했던 재치나 촌철살인 가사도 거의 없고 귀에 때려박히는 기타리프가 아깝다’라든가 ‘어디에나 있는 인디 락밴드로 바뀌어버렸네. 3집까지만 내고 해체했다면 한국의 너바나가 되었을텐데’ 부터 시작해서 ‘결국 얘네들도 별 다를 게 없는 밴드’라며 장얼을 쿡쿡 찔러보는 댓글러 여러분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래도 해체는 너무 아쉽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요즘 장얼 노래를 엄청 듣는다. 길거리에서 노랫말을 흥얼거린다. 어설픈 글 솜씨로 밴드 해체에 대한 헌사 글(괴상하다)을 쓴다. 그러면서 장얼의 음악이 내 20대를 얼마나 풍부하게 했는가에 대해 곱씹어본다.
요즘 장얼의 공연이 한창이다. 앞에서 그렇게 쌩난리를 쳤지만, 사실 나는 장얼 단독 콘서트에 가본 적이 없다. 록 페스티벌에서 몇 번 본 게 전부고, 그 외에는 인터넷에서 라이브 공연 영상으로만 장얼을 만나왔다. 내 최애 밴드의 마지막을 못 보면 어떡하니...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든 직접 보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돈이 없다, 시벌. 내 통장 잔고 23,050원. 결제에서 막혀서 티켓팅을 못한다. 요 며칠은 면접 결과를 기다리느라 꼼짝 못 했다. 경제적 활동 없이 그저 읽고 생각하고 쓰기만 한다. 스케줄이 잡힐까 봐, 최종 합격될까 봐서 알바도 지원 못하는 신세. 백수라고 한가한 게 아니라고.
이것도 연기지 뭐, 하고 마음을 내려놓는다. 마지막의 현장에서 즐길 순 없지만 내가 가진 조건들에 맞게 응원할 뿐이다. 내가 PD가 된다면 그때는 또 달라질 거다. 뭐라도 할 거다. 몇십 년이 지나 재결합해 공연한다면 암표라도 살 거다. 암튼 그렇게 생각하니 평온을 되찾았다.
초심을 잃었다는 불알친구 녀석과 헤어지면서 노래 한 곡을 추천했다. (上편 참조) 당연히 내 선택은 <mono>의 8번 트랙 초심. 와 선곡 센스 쩔었다, 노래 듣고 펑펑 울면 어쩌지 하며 걱정했다. 그런데
[나] [오후 6:58] 초심 들어봤냐
[나] [오후 6:58] 소감이 어때
[친구] [오후 7:03] 응
[친구] [오후 7:03] 완전별로였어
역시 착각이었다. 응 그건 내 생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