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정환피디님이 한 거죠?

내가 집에 안(못) 들어간 이유

by 조정환Juancho

프로그램 제작 중에 피디들은 집에 잘 안(못)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론 아무도 피디에게 밤을 새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하다보니까 자발적으로 밤을 새고 있(?)거나 잠을 못 자고(...) 집에도 안 들어가는 동료들과 나를 보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첫째는 처리해야 할 일(Task) 자체가 많아서고

둘째는 업무 처리 환경의 특성 때문인 것 같다.

나의 경우에는 두 번째 이유가 더 와닿았다.


방송 제작 일이란 게, 기한은 정해져있지만 과정에 있어서는 매뉴얼이 없다.


'다음주 수요일까지 완성'해야 하면,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된다. 뭐라고... 더 이상 덧붙일 조건이 없다. 그냥 알아서 하면 된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든 말든 담당자 자유다. (물론 조직에 따라 근무 환경이 다를 수는 있지만) 주어진 시간동안 각자의 방식대로 일하면 되는 것이다. 기업 인적성시험처럼 시간표가 정해져있거나 'X시 이후에는 퇴근' 같은 룰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피디에게는 그런 개념이 잘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다.


회의와 촬영 준비를 마치고 저녁까지 먹은 지금은 20시, 편집을 하다보면 욕심이 생기고 내일 답사 가야하는데 집에서 자고 오자니 시간도 없고 그럼 편집도 못한 채 자막 시작해야하고... 배는 고파오는데 집 들르자니 귀찮음이 밀려오고 근데 잠은 오니까 (사무실 옆방 5m 거리엔 라꾸라꾸 침대가 날 반긴다) 편의점 가서 한입과일이나 사와야지. 그렇게 잠 깨러 밖으로 나오면 새벽. 차도 사람도 없는 길거리 감성에 취해 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며 약간 리프레시를 한 후 편집실 들어와 이것저것 하다보면 엥? 언제 아침 7시됐냐.


어떻게든 18시(퇴근 시간)에 맞춰 마무리지으면 되는 거 아닌지...? 물론 불가능은 아니고 어떻게든 렇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A 게스트 부분 자막 정환피디님이 쓴 거죠?"

한 작가님의 말씀이셨다.


헉 어떻게 아셨죠? 하고 물었다.

피디들이 파트를 나눠 쓴 자막을 작가님이 한데 모아 검수하는 과정에서 '글 잘썼다' 싶은 부분이 있었고 이 파일을 누가 만들었나 찾아봤더니 내 이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론은 잘 썼다고 칭찬하신 거였다.

와 그건 내가 여기 들어와서 정식으로 처음 써본 자막이었다.


쑥스러운 나머지 황급히 대화 주제를 돌렸지만, 사실은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진지한 톤의 이야기라서 자막 쓸 때 고민을 했었더랬다


또 프로그램 전 회차에 내가 전담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다음이야기/예고' 편집(보통 본편 다 끝나고 스태프 롤이 나올 때 같이 나온다).


10시간이 넘는 촬영본을 30초 ~ 1분 내외의 '다음이 궁금한' 영상으로 만드는 일인


당연히 딱히 가이드라인이라든지 매뉴얼이 없다. 조건은 오직 메인 연출 선배에게 컨펌을 받을 정도로 괜찮기만 하면 된다. 방향은 내가 원하는대로. 통과되면 내가 만든 그대로 TV와 웹에 나간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동시에 그대로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거다.


다행히 통일성 있는 예고 시리즈를 만들 수 있었다


거창하게 적어놓았지만 이 일은 귀찮음의 연속이기도 하고 부담만 되는 경우가 많다. 있었지만 난 좋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프로그램 내에 나만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게 뿌듯했고

그걸 누군가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자극이 됐다.


인터넷에는 예고에 나온 음악 뭔지 묻는 글이 올라오고 작가님들은 '예고 장인'이라며 찬해주시고 (립서비스겠지만...) 선배들도 지인들이 예고 재밌어서 본방 기대된다고 했다더라 하며 격려해주었다.


음 뭐랄까


아무리 사소한 걸 만들더라도 그 결과물엔 제작자의 관점이 드러나고 색깔이 묻어난다. 유투브 개인방송이든 광고든 티비 프로그램이든.


대부분의 경우엔 이걸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게 훅- 지나가지만, 그렇게 지나가는 과정 속에서 누군가는 성장하고 아는 사람은 성장을 눈치챈다. 그리고 경험치는 만드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져다 줄거고 결과물은 언젠가 터진다. 비단 방송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거다.


꼭 매순간 그런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사무실에 있는 라꾸라꾸 침대를 펼쳐놓고 쪽잠을 잤음에도 피곤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