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자막이라면 없는 게 낫지 않나?

채워야 한다는 강박

by 조정환Juancho

(들어가기 전에_)


마지막 글을 쓰고 나서 세 달이 지났다.

인생의 큰 일들이 있었다. (언젠가는 적게 될 것이다) 그래서 꽤 오래 글쓰지 못했다.

그래도 머릿속에는 '이거 다음엔 저거, 저거 다음엔 요거를 써야지...' 하는 계획 정도는 있었고

'작가의 서랍' 칸에다가 저장해놓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열어보니 사실

너무 오래전 일처럼 느껴져 기억이 잘 안 났다. 김영하 작가가 <여행의 이유>에서 쓴 구절처럼.


오래전에 읽은 소설을 다시 펼쳐보면 놀란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거의 없다. 소설 속의 어떤 사건은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 반면 어떤 사건은 금시초문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은 일인데 그래서 적어놓은 경험들인데 남의 것처럼 가물가물하다니... 아예 없던 일처럼 다 지우고 새로운 챕터를 열어볼까 생각해봤지만, 그냥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마무리 짓기로 했다. 나를 위해 그리고 글을 읽을 익명의 독자분들께도 그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어쨌거나 나는 다시 정기적으로 글을 써볼 생각이다. 글감으로만 남겨두었던 <주간산악회> 때 이야기를 마저 다 쓰고, 그다음 챕터로.




https://brunch.co.kr/@juancho/94



(전 글에 이어서)


마침 자막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주간산악회>에서는 PD들이 자막을 나눠 썼다(작가 쪽에서 쓰는 경우도 있다. 프로그램마다 다르다). 장면에 맞는 내용을 쓰고, 어울리는 폰트를 골라서 (**프로그램마다 자막/그림 양식을 정리해 놓는다. '##기본상황1', '##공포체', '##의성어2' 이런 식으로. 보통 '자막 폼'이라고 부른다.) 워드 문서 같은 데다가 정리해놓는다.


내게 주어진 분량은 회당 15분 내외.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꽤 많은 양이다.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왜 그러냐면... 볼 때는 스르륵 넘어갔던 장면들을 붙잡아 자막 한두 줄로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같은 장면도 몇 번씩 돌려보게 된다. 그것도 초 단위로! 그다음엔 고민한다. 드립을 칠까? 아님 설명으로 끝낼까? 감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나? 의외로 결정할 게 많은 것이다. 다른 차원의 편집이다. 그것도 창의성이 필요한.



시청자가 그냥 지나칠 뻔한 포인트를 짚어주는 자막들


어쨌든 계산하면 대략 1분 분량 쓰는데 3~40분은 걸리니까... '15분짜리 작업 = 반나절 소요'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자막 텍스트 완성하는 데에만 하루를 다 쓰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이 노동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곤 한다. '내가 기계적으로 자막을 쓰고 있다'라고 느끼는.


웃긴 장면엔 드립이나 밈, 감동 씬에서는 서정적인 글귀. 뭐 이런 식으로 내용만 다를 뿐 공식처럼 비슷한 톤의 자막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혹은 실제론 별 의미 없는 순간인데 굳이 과장을 해서 표현한다거나(설명하기 어렵지만 자연스러운 과장이 있고 억지 과장이 있다. 경계는 아주 모호하다.) 진짜 재미를 위해서 쓰는 게 아닌, 자막을 위한 자막. 그리고 그걸 쓰고 있는 나.


아마도 현재 TV에 나오는 모든 예능 프로그램은 비슷한 레벨의 밀도로 자막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괜찮나 싶다. 나의 입장은 '(현재 예능에서 쓰이는) 자막은 필수처럼 보여도 사실 대다수의 상황에서 쓸데없다'는 쪽이기 때문이다. 너무 삐딱한 시선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시청자일 때부터, 가끔은 자막이 너무 남용된다는 의문이 들곤 했다. 그리고 실제 써보면서 한번 더 느낀 것이다.


강박 때문이지 않을까. 더 채워야 한다는, 더 보여줘야 한다는, 더 증폭시켜야 하고, 더 이해시켜야 한다는 그런. 나부터도 그런 마음이었다. 자막으로 안 채우자니 불안했다. 하지만 모든 프로그램이 다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화면을 비워야 더 살아나는 장면이 있고, 설명을 덜 해야 더 와닿는 순간이 있다. 과한 양념이 재료의 색깔을 해치듯, 어떤 프로그램을 볼 땐 너무 촘촘한 자막 때문에 피로하다.


물론 그냥 내 생각이다. 예전에 <삼시세끼>인가 <윤스테이>인가를 보면서 감탄한 적이 있다. 별 거 아닌 장면들이었는데 위에 깔린 자막 덕에 더 풍경도 이뻐 보이고 캐릭터도 더 생기발랄해 보였다. 그렇게 스토리텔링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랑은 안 맞는다고 느꼈다. 내가 그런 걸 잘하지도 못할 뿐더러(섬세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그런 방식에 크게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있을 때, 나는 덜어내는 식으로 표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촬영장에서도 편집할 때도, 여백을 많이 남겨두는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