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오늘 하루는 잘 풀릴 것 같아, 라고 생각하게 되는. 주왕산 촬영 전날이 그랬다.
5화 촬영지는 경북 청송의 주왕산이었다.
선유도(출발) 콜타임은 새벽 4시. 내 출근 시각은 토요일 밤 11시. 촬영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막내 연출은 50여 명이 현장에서 움직이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준비한다. 이런 식이다. 배차 스케줄을 확인하고, 각 스태프 분들께 공유하고, 필요한 짐(방석, 인형, 각종 소품)을 등산 배낭 10개에 나눠 담는다. 트윅스와 소시지, 새콤달콤을 지퍼락 10봉지에 소분하는 것도 잊지 않고. 물론 물 500ml 100개와 핫팩 2박스는 따로 챙긴다. 김밥 70줄이 '새벽 3시 반'에 배달 오는 지도 체크. 조금 귀찮을 수도 있는, 그러나 대충 할 순 없는 일들.
그런데 그날따라 너무(?) 쉬웠다. 뭔가 수월했다. 내가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챙겨지는 느낌? 다섯 번째 반복하는 일이라 그런가, 손이 알아서 움직였다. 배차마저 좋았다. 스타렉스를 신청했는데 스타리아(좌석이 조금 더 편함)가 왔다.... 럭키♥ 조수석에 앉아서 가는 내내 잘 잤다. 아마 코도 골았을 것이다.
아침 먹을 식당에 도착했을 때 시각은 7시. 먼저 도착한 스태프 분들이 된장찌개를 맛있게 드시고 계셨다. 준비한 것들이 착착착착. 나는 직감했다. 오늘 촬영은 아주 깔끔하게 끝나겠군. 기분이 좋아졌다.
핫팩을 챙기고 착석.
돼지김치찌개 한 숟갈 뜨려는찰나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리가 '느껴졌다'
맞은편 메인PD 선배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말이다.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닌데...)
'우리 블랙야크 협찬 가방은...'
협찬?
ㅎㅕㅂ...ㅊㅏㄴ?
4화부터 협찬 품목(MC 등산복&가방)이 붙긴 했다만 이번 촬영 때 챙길 게 있단 건 처음 들었다. 그렇다. 분명 분명 분명히 처음 듣는 얘기였다. GURONA.... 나는 분명 막내 연출이고... 내가 '알았어야' 했을 것 같은 FEELING... 그리고 그게 뭔지 왠지 알 것 같은 NUKKIM...
전날 밤 물품을 챙길 때,
새벽에 김밥 배달을 받을 때,
그리고 사무실 나오기 직전에도
구석에 쇼핑백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검은색 블랙야크 종이 쇼핑백. 물론 뭐가 들었는지 모른다. 내용물을 확인하지도 않았으니까. 내 꺼도 아니고 누가 얘기해준 적도 없고 나랑 관련도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그거 서울 사무실에 있다. (쎄한데....)
그리고 이어지는 선배의 이야기
'손아섭 선수 인터뷰 끝나고 가방 드리는 것까지 찍으면 될 것 같아요'
그때 난 직감했다.
'좆됐다.'
여기는 경북 청송, 지금은 7시였다.
아...앙돼!
그대로 일어나서 짱구를 돌려봤다.
지금 상황이 어떻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했다. 안 그러면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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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드시 해야 할 일: 협찬 물품을 게스트 인터뷰 끝 시간인 11시까지 촬영지로 가져오는 것
2. 협찬 물품의 정체: 출연자가 착용할 외투와 가방. 인터뷰 말미에 선물 주는 장면을 찍어야 함. (계약사항)
3. 협찬 물품의 위치: 선유도 제작사 사무실 내 회의실 구석에 있는 검정 쇼핑백 (추정)
주의사항: 그 쇼핑백이 협찬 물품이라 확신할 수 없음(내용물 확인 안 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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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하지만 뭐라도 걸어야 했다. 일단 GO. 시도해보자.
그런데 지금은 아침 7시 반, 사무실에 아무도 없을 가능성 큼.
그리고, 이걸 누가 가져올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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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누가 다시 갔다 온다.
>>> 왕복 6시간 +a 걸린다. 토요일 아침 낮에? 불가)
B. 청송 내에 있는 협찬 브랜드 매장에서 같은 품목 찾아서 산다
>>> 산이라 가장 가까운 매장도 왕복 2시간은 걸린다. 게다가 협찬 담당자분께 확인해보니 해당 매장은 10시에 오픈. 연다고 한들 협찬 해당 품목이 있을지도 확인 어렵다고.
C. 서울 사무실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해 퀵을 보낸다.
>>> 지금 할 수 있는 젤 현실적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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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를 이행하기로 하고 수소문을 시작했다. 일요일 7시지만... 철판 깔고 전화를 돌린다... 제작사 막내분이 마침 나온다고 한다. 오! 일단 다행인데... 그걸 누가 갖고 오지? '선유도 - 주왕산 입구'는 네이버 지도로만 307km, 택시비 28만 원이 나오는 거리다.
3시간 23분 실화냐...
결론이 어떻게 됐냐고?
블랙야크 협찬 물품은 무사히 배달되었다.
- AM 7:35 / 배차 기장님의 동료(자고 계심)를 깨움
- AM 7:40 / 선유도 사무실에서 물건 받아 주왕산 입구까지 와달라고 부탁
- AM 7:45 / 기장님 세수만 하고 (ㅠㅠㅋㅋ) 출발
- AM 8:30 / 본촬영팀은 등산로 오르는 촬영 시작. 나는 함께 이동
- AM 10:30 / 첫 번째 게스트 인터뷰 시작
- AM 11:00 / 기장님의 콜. '20분 후 도착.' 나는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가장 마지막 길인 매표소로 이동
- AM 11:25 / 매표소에서 상봉. 협찬물품 인계 (이때까지도 쇼핑백 안 내용물 확인 안 함)
- AM 11:30 / 매표소에서 촬영지까지 질주. 본인, 개 같이 뜀.(4km 거리)
- PM 12:00 이전 / 촬영지 도착. 쇼핑백 전달.
- PM 12:15 / 첫 번째 게스트 인터뷰 끝
12시부터 12시 5분정도까지는, 헐떡거리느라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문제의 그 블랙야크 협찬품은, '마치 원래부터 같이 있었던 것처럼' MC의 손에 들려있게 나왔다.
이 장면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먼산)
다행히 그날, 더 이상의 사고는 없었다. 여담이지만, 메인 연출 선배는 아마 우리의 사정을 모르는 듯했다. 촬영 직후 후배 피디들을 불렀고 오늘 같은 일 절대 없게 하라며 질책했다. 음....아... 옙. 조금 황당하고 허탈하긴 했다. 어디서 커뮤니케이션 오류가 있었을까. 따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진 않았다. 그럴 상황도 기분도 아니었다. 피곤했다. 그저 우리는 뒤풀이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고생했다고 서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