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바람이 지난 자리

by 앙티브 Antibes


네가 떠난 뒤로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문이 하나 더 생겼다.


아침이면 커튼 끝이 먼저 흔들리고,
아무도 열지 않은 창틈으로
이름 없는 서늘함이 들어와
내 어깨를 가만히 짚고 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다.
이제 너는 발소리 대신
바람의 쪽지 같은 것으로
내 곁에 다녀간다는 것을.


오래된 친구여,
함께 걷던 골목의 은행나무는
해마다 제 잎을 다 비우고도
끝내 봄을 잊지 않더라.


너와 나도 그랬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한 사람의 침묵이 다른 사람의 저녁을
얼마나 오래 밝혀 줄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지.


그러니 네가 사라졌다고
끝내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네가
너무 환한 쪽으로 옮겨 앉았을 뿐,

내 눈이 아직
그 빛에 익숙하지 않을 뿐.


어느 날은 비가 내린다.
지붕을 두드리는 작은 물방울들 사이로
너의 웃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아
나는 우산도 펴지 못한 채 한참 서 있다.


젖은 소매 끝에서
오래전 네가 건네던 위로의 온도가 번지면,
죽음이란 어쩌면
한 사람을 아주 멀리 데려가는 일이 아니라
보이는 방식만 바꾸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늦게야 생각한다.


너는 이제
가을 저녁의 높은 하늘에도 있고,
겨울 들판을 건너는 희디흰 숨결에도 있고,
꽃이 피기 전
나무들이 먼저 알아채는 푸른 기척에도 있겠지.


보이지 않아 더 넓어진 존재로,
잡히지 않아 더 깊어진 손길로.

그래서 나는 오늘도
네 무덤가에 꽃을 두기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오래 바라본다.


바람에 기우는 풀과
물 위에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빛과
저녁놀 속으로 천천히 날아가는 새들.


그 모든 연약한 것들이
이상하게도 무너지지 않고
끝내 하루를 건너가는 모습을 보며
너도 저렇게
세상의 여러 결로 흩어져
나를 지나고 있겠구나 생각한다.


친구여,
너를 잃은 마음은 아직도
낡은 상자처럼 밤마다 조금씩 운다.


그러나 그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드나들고,
그 바람이 내 안의 먼지를 쓸어
마침내 한 줄의 기도로 남긴다.


부디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외롭지 말고,
우리의 어린 날처럼
아무 이유 없이 웃을 일이 많기를.


나는 여기서
네가 남기고 간 계절들을 잘 건너 보마.

꽃이 지는 소리와
눈이 녹는 냄새와
저물녘마다 잠시 금빛이 되는 강물을
네 몫까지 오래 바라보마.


그리고 언젠가
내 이름도 바람에게 가벼워지는 날이 오면,
그때는 알겠지.
이별이 끝이 아니라
서로를 다른 하늘로 불러 보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까지는,
네가 다녀간 자리마다
조용히 흔들리는 공기를 끌어안으며
살아가겠다.


세상에 바람이 많은 것은
떠난 이들이
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못해서라고,
나는 오늘도
네 생각 속에서
가만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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