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떠난 뒤에야
그릇의 모양을 오래 기억하고,
봄은 아직 문턱에 서 있으면서도
벌써 몇 송이 바람을 먼저 들여보낸다.
나는 이제야 압니다.
한 사람의 온기가
얼마나 조용히 한 집의 저녁을 지켜 왔는지,
얼마나 오래
말 없는 등불처럼
우리의 어두운 곳을 덥혀 왔는지.
곁에 있을 때는
그 따뜻함이 마치
원래 세상에 늘 있는 공기인 줄 알았습니다.
창을 열면 들어오고
눈을 감으면 스미는
너무 익숙하여
감사조차 배우지 못한 봄볕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리석어
꽃이 진 뒤에야 향기를 더듬고,
물이 마른 뒤에야
우물이 하늘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왜 우리는
지나간 것의 자리에만 귀를 대고서야
거기 오래 머물던 심장 소리를 듣게 되는지,
왜 상실은
가르침보다 먼저 울음이 되어 오는지,
나는 내 늦은 깨달음 앞에
자꾸만 고개를 숙입니다.
책망은 저문 뜰의 그림자처럼
발끝에 길게 누워
내 마음을 따라다니고,
후회는 마른 가지 끝에 매달린
지난겨울의 마지막 잎새처럼
바람만 스쳐도
작게, 또 오래 떨립니다.
그분은 떠나셨는데
이제야 세상 곳곳에서
그분의 다정이 피어납니다.
미처 여미지 못한 내 옷깃을
보이지 않는 손이 가만히 여며 주는 저녁,
식어 가는 찻잔 곁에
누군가 아직 앉아 있는 듯한 적막,
햇살이 오래 머문 창틀 위에서
문득 따뜻해지는 먼지의 숨결
나는 그런 사소한 것들 속에서
뒤늦게 그분의 이름을 배웁니다.
봄의 초입,
아직 꽃은 다 피지 않았고
바람은 겨울의 체온을 조금 남긴 채
골목마다 서성입니다.
그 어정쩡한 계절의 틈에서
그리움은 더 선명해져
막 녹기 시작한 냇물처럼
자꾸만 가슴 안쪽을 건드립니다.
목련 봉오리는
차마 다 열지 못한 편지 같고,
산수유의 노란 기척은
멀리서 겨우 닿는 안부 같아서,
나는 오늘도
오지 않는 발자국을 기다리듯
봄빛이 드는 쪽으로
가만히 몸을 기울입니다.
그분이 계셨다면
이 바람의 냄새를 먼저 알아채셨을까요.
이 봄의 연약한 문장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이제 곧 따뜻해지겠구나”
낮게 웃으셨을까요.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다시 한 번
잃어버린 계절의 아이처럼 웁니다.
아, 인간은 어쩌면
품 안에 있을 때는
그것을 삶이라 부르고,
품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사랑이었다고 쓰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한 철 늦게 철이 들고,
한 사람을 다 잃고 나서야
그 사람이 우리 안에 심어 둔
봄의 씨앗을 발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나는
늦은 깨달음으로라도
그분을 오래 불러 보려 합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작은 불빛 하나씩 놓아 두듯,
남은 날들의 어둠 속에서도
그분의 따뜻함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봄은 오고
그분은 오지 않지만,
그리움은 해마다
더 여린 잎으로 돌아와
내 마음의 가지 끝에 앉습니다.
나는 그 잎 하나 함부로 떨구지 못한 채
하염없이 서서,
이제야 알게 된 사랑의 무게로
조용히, 아주 조용히
봄을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