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 어디엔가 너를 기다리는 집이 하나 있어 (2)

by 앙티브 Anti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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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번의 저녁이 더 지나고

골목 끝 바람의 결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날들이 왔다.


아직은 외투의 단추를
끝까지 채워야 하는 저녁인데도
어디선가 먼저 풀려 나온 흙냄새가
계절의 속내를 슬며시 내비치고,

마른 가지 끝마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숨들이
연둣빛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겨울은 완전히 물러난 적 없는데
봄은 자꾸 문밖에 와 서성거려,
세상은 아직 차가운데도
자꾸만 따뜻한 이름을 품게 된다.


나는 그 묘한 틈 사이를 지나며
문득 네 생각을 한다.


오래 얼어 있던 강물도
처음에는 소리부터 풀린다지.
보이지 않는 아래쪽에서 먼저
가만가만 금이 가고,
햇빛은 그 얇은 틈을 따라
늦은 용서를 배우듯 번져 간다고.


그래서인지
네 마음에도 언젠가
이 겨울을 다 설명하지 못한 채
먼저 스미는 온기가 있을 거라고,
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조용히 믿게 되었다.


아파트 화단 가장자리에는
지난 계절의 잎들이 아직 눕혀져 있는데
그 아래에서 어린 풀 하나가
제 몸보다 먼저 빛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힘을 오래 바라본다.


견디는 일은 때때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계절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이 무렵의 땅은 말없이 가르쳐 주니까.


그러니 네가
아직 봄을 봄이라 부르지 못해도 괜찮다.

햇살이 와도 선뜻 믿어지지 않고
꽃소식이 들려와도
마음 한쪽이 여전히 눈밭처럼
서늘하게 남아 있어도 괜찮다.


봄은 원래
한 번에 오지 않고,
사라지지 못한 추위 곁에
조용히 앉아
오래 기다리며 사람을 데우는 법이니까.


나는 네가 언젠가
조금 덜 아픈 숨으로
창문을 열어 보는 아침을 상상한다.

차가운 유리 끝에 맺히던 입김 대신
희미한 꽃내음이 번지고,
먼 데서 날아온 바람이
네 이마를 가만히 짚어 보며
이제는 울어도 된다고,
이제는 조금 놓아도 된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해 주는 아침을.


그때가 오면
내가 마음속에 지어 둔 그 집의 마당에도
겨우내 비워 두었던 화분마다
늦은 싹이 하나씩 돋아나겠지.


네가 벗어 둔 슬픔 가까이에도
이름 모를 꽃 한 송이쯤은 피어나서
아무 말 없이
오래 아팠던 시간을 위해
가장 작은 색으로 먼저 위로를 건네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 나은 미래보다
조금 풀린 바람 하나,
조금 늦게 번지는 빛 하나,
조금 먼저 도착한 꽃냄새 하나를
너를 향한 희망으로 삼는다.


완연한 봄은 아니어도
분명 봄 쪽으로 기울어지는 저녁,
그 연약한 방향만으로도
사람은 다시 내일을 건널 수 있다는 듯이.


혹시 네가
아직도 긴 겨울의 이름 안에 서 있다 해도
기억해 줘.

계절은 늘
가장 추운 자리의 곁을 지나
가장 먼저 연해지고,

꽃은 늘
보란 듯 피기 전에
먼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안의 문을 연다는 것을.


그러니 너도
너를 너무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은 찬 기운이 남은 저녁마다
나는 여전히 그 집에 불을 켜 두고,
다가오는 봄의 발자국을 들으며
네 몫의 따뜻함까지
조금 먼저 품고 있을 테니.


언젠가 네가
겨울과 봄의 경계 같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나는 다만
오래 기다려 온 사람처럼 웃으며
네 어깨에 내려앉은 마지막 서늘함까지
천천히 녹여 줄 차 한 잔을 건넬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알게 되겠지.

끝내 오지 않을 것 같던 계절도
이렇게 조용히 사람의 곁에 와 있었음을,


행복이란 어쩌면
환한 한낮보다
이토록 더딘 해빙의 순간에
먼저 숨을 틔우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