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인 줄 알았던 쪽으로
빗금이 먼저 온다.
추적추적,
그러다 문득
사선으로 몰아치는 찬 물의 혀.
창은 오래 젖어 있고
골목은 구겨진 은박지처럼 빛난다.
바람은 나뭇가지의 마른 뼈를 흔들어
아직,
아직,
하고 말한다.
겨울이 흘리고 간
얇은 칼 한 자루,
보이지 않는 손등으로
목덜미를 스친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먼저 새어 나오는 것,
젖은 흙의 미열,
덜 깬 봉오리의 푸른 냄새,
먼 곳에서 접어 보낸
초록의 숨.
흙은 젖을수록 더 깊은 쪽을 열고,
봉오리는 닫힌 채로 더 푸르다.
봄은 늘
모습보다 향기로 먼저 와
보이지 않는 문을 연다.
우리는 자주
지나가는 것을 영원이라 부르고,
잠시의 그늘 아래 웅크려
세상의 끝을 혼자 앞당긴다.
그러나 비는
제 무게를 다 쓰면 그치고,
찬 바람도
끝내는 제 칼집으로 돌아간다.
모든 일에는
마지막 물방울이 있고,
마지막 떨림이 있고,
마지막 어둠의 결이 있다.
괴로움은
한 철 눌러앉은 검은 새,
영원처럼 울지만
결국 날아가는 그림자.
그러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끝이 있다는 사실,
젖은 하루의 뒤편에도
마른 빛이 접혀 있다는 사실.
나는 오늘
비에 젖은 가지 끝에서
아직 오지 않은 꽃의 체온을 생각한다.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는
가느다란 선 하나를 생각한다.
그리고 조용히
지나갈 것들의 이름을 놓아준다.
비,
바람,
추위,
너무 길게 믿어버린 마음의 겨울.
그 너머에서
봄은 아무 말 없이
젖은 신발로
천천히,
그러나 끝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