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긴 숨이
아직 가지 끝에 남아 있을 때,
아무도 올려다보지 않던 그곳에서
작고 여린 눈 하나가
조용히 세상을 연다
봄은 늘 그렇게
이름도 없이 시작되었다
견딘다는 것은
말없이 시간을 껴안는 일,
벚나무는 그 긴 어둠을 지나
잠시의 빛을 위해
자신의 모든 계절을 모아 두었다
세상은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봄은 그 미세한 떨림 속에서
이미 한 계절을 다 쓰고 있었다
겨울은 떠나지 않고
다만 투명해졌을 뿐,
그 위에 얹힌 작은 숨 하나가
빛을 배워
꽃이 되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시간은 부드럽게 뒤집힌다
견딘다는 것은
소리 없이 뿌리를 깊게 하는 일,
벚나무는 어둠을 길어 올려
하얀 언어로 번역해 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늘이 잠시 낮아지듯
꽃들은 일제히 피어나
세상의 높이를 바꾼다
사람들은 그 찰나를
영원이라 부르며
가슴 속에 접어 담지만,
정작 꽃은 알고 있다
머무름이 아니라
흘러감 속에서만
자신이 완성된다는 것을
바람이 불면
꽃잎은 스스로의 빛을 놓아버리고
하늘과 땅 사이를 천천히 떠돈다
그것은 추락이 아니라
하늘을 다 써버린 이들의
마지막 문장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문장으로
계절 속에 남는 일
그래서 낙화는 슬프지 않다
그것은 끝맺음이 아니라
다음 봄을 향해
조용히 봉인되는 편지이므로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시간이 다음 장을 넘기는 소리이기에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봄은
아직 피지 않은 채
조용히 준비되고 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피지 않은 시간들이
가지 끝에 매달려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